[토요판] 커버스토리
호준과 호이준 사이에서 ① 출국 준비
여섯살 때 엄마 따라 한국 들어와
22년 살아온 미등록 몽골이주청년
출입국·외국인청에 자진출국 신고
한국서 살려면 출국 뒤 재입국뿐
고교 졸업과 동시에 단속 대상
“강제퇴거 중단, 체류 방안 마련”
국가인권위 권고에도 법무부는
“출국해야 재입국 심사” 방침 고수
친구들과 똑같다 믿고 지내왔는데
졸업 뒤 겪은 차별과 단속의 공포
쫓겨나지 않기 위해 목소리 죽이고
불이익 견디며 “없는 사람처럼 살아”
호준과 호이준 사이에서 ① 출국 준비
여섯살 때 엄마 따라 한국 들어와
22년 살아온 미등록 몽골이주청년
출입국·외국인청에 자진출국 신고
한국서 살려면 출국 뒤 재입국뿐
고교 졸업과 동시에 단속 대상
“강제퇴거 중단, 체류 방안 마련”
국가인권위 권고에도 법무부는
“출국해야 재입국 심사” 방침 고수
친구들과 똑같다 믿고 지내왔는데
졸업 뒤 겪은 차별과 단속의 공포
쫓겨나지 않기 위해 목소리 죽이고
불이익 견디며 “없는 사람처럼 살아”
6살 때부터 22년간 한국에서 살아온 김호준(가명·28)씨가 지난 6월16일 자진출국 신고를 하러 수원출입국·외국인청 건물로 들어가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두 이름의 한 사람 호이준. 1992년 몽골에서 태어났다. 그해 몽골의 사회주의가 붕괴했다. 체제를 지탱해온 삶들이 대책 없이 흔들렸다. 호이준의 엄마는 가족을 부양할 생계수단을 찾아 2년 뒤 홀로 한국으로 건너왔다. 관광비자를 취업비자로 바꿔준다던 브로커에게 속아 미등록이 됐다. 2년 만에 몽골로 돌아갔을 때 엄마가 한국에서 벌어 송금한 돈으로 아빠는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다. 아빠와 이혼한 뒤 누나(당시 15살)를 할머니에게 맡긴 엄마는 1998년 어린 호이준만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공장에 다니며 번 돈으로 호이준을 키웠고 몽골로 딸의 학비와 생활비를 보냈다. 호이준은 한국에 온 뒤로 한번도 아빠와 연락한 적이 없었다. 호이준이란 이름으로 불릴 일도 없었다. 호준. 한국에 온 뒤 8개월간 문 잠긴 집에서 지냈다. 아들을 혼자 두고 출근해야 했던 엄마는 먹을 것을 챙겨주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점심시간에 돌아와 밥을 주고 갔고 저녁에도 밥을 차려주고 잔업을 하러 갔다. 집 안에 갇힌 아이는 자신이 사는 곳이 몽골인지 한국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엄마가 틀어둔 텔레비전을 보며 한국말을 배웠다. 동네 교회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을 다니며 집 밖으로 나왔다. 교회 목사의 도움으로 초등학교에도 입학(미등록 신분이어도 학교장 재량으로 가능)했다. 학교에서 한국 이름이 필요하다고 했다. 성은 목사의 성을 따라 ‘김’이 됐고 이름은 호이준과 비슷한 호준으로 했다. 그 이름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2011년)했고 그 이름으로 불리며 지금까지 살았다. 22년간 호준 아닌 적이 없었다. “이거 보여주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네.” 호준이 챙겨 온 문서들을 살펴보며 이 소장이 말했다. 중학교 재학증명서, 고등학교 졸업장, 모범상장, 장학증서, 신원보증서…. 호준이 어깨에 둘러멘 가방 안엔 그의 지난 시간들이 ‘법 테두리 안’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수원 영통역이었다. 역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수원출입국·외국인청이 있었다. 단속이 두려워 미등록 체류자들이 근처에도 가려 하지 않는 기관을 호준은 스스로 찾아가고 있었다. 자진출국 신고를 위해서였다. 어린 시절부터 호준과 엄마의 한국 생활을 도와온 이 소장이 동행했다. 호준이 자진출국 절차를 밟는 이유가 있었다. 법무부와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12월 ‘체류질서 확립 등을 위한 불법체류 외국인 관리대책’을 발표했다. 그해 연말까지 “불법체류 외국인 수가 40만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가파른 증가 추세”를 막을 “새로운 제도”를 내놨다. 올해 6월 말까지 스스로 나갈 경우 미등록 체류에 따른 범칙금과 입국금지를 면제하고 일정 기간(6월 출국하면 6개월 뒤) 지나 재입국 심사 기회를 주는 방안이었다. 당근 뒤엔 채찍이 예고됐다. 7월부턴 범정부 합동단속이 시행될 예정이었다. ‘단속에 따른 강제출국 땐 범칙금을 부과하고 납부하지 않으면 영구 입국금지한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벌써 10년째였다. 단속으로부터 지켜줄 ‘보호막’(학생 신분)이 사라진 지 오래인 호준에겐 다른 길이 없었다. 호준이 한국에서 계속 살려면 한국이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호준 대신 ‘체류자격을 가진 몽골인 호이준’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자진출국 뒤 재입국’은 호준으로 나갔다 호이준으로 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신고 시한 2주일을 남기고 호준이 출입국·외국인청에 들어섰다.
한국에서 22년을 살아온 몽골이주청년 김호준(가명·28)씨가 지난 6월16일 출입국·외국인청에 자진출국 신고를 하러 지하철로 이동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자진하지 않은 자진출국 “수흐…? 스훕…?” ‘불법체류 외국인 자진출국 신고서’의 ‘성명’ 칸을 채우던 호준의 발음이 막혔다. 자신의 몽골 이름의 첫 음절부터 호준은 제대로 읽지 못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가 이름에 남긴 ‘흔적’(몽골은 아버지 이름이 자녀 이름 앞에 성처럼 붙음)은 여권을 보고 따라 그리지 않으면 철자를 정확하게 쓸 수도 없었다. “정말 (한국에서) 오래 사셨네요.” 호준이 써낸 ‘신고서’를 보며 심사과 직원이 말했다. “네.”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호준은 최대한 짧게 답했다. 체류자격 앞에 붙은 ‘불법’은 어떤 이유로 한국에 와서 어떻게 살았는지와 상관없이 그를 주눅 들게 했다. 호준은 한국 사회에 존재하지만 그 규모를 알 수 없는 존재들 중 한 명이었다. 2018년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 236만7607명 가운데 미등록 외국인은 35만5126명이었다. 그들 중 아동·청소년의 수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법무부는 “2018년 연구용역에 근거해 최소 7800여명에서 최대 1만2천여명으로 추정”(외국인정책과) 했으나 이주인권단체들은 “2만명이 넘을 것”으로 봤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입국했든,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든, 그들의 ‘존재 없음’은 자기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인의 언어·문화와 생활습관을 갖고 “정말 오래” 살았어도 그들은 단지 ‘불법체류 외국인’으로 강제퇴거 대상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방안이 국내엔 마련돼 있지 않았다. 현행 출입국관리법엔 이주 아동·청소년의 체류 자격을 명시하는 별도 규정이 없었다. ‘학습권 지원’ 차원에서 고등학교 재학 때까지 강제퇴거를 유예하는 조처가 전부였다. 이 조처가 시행되기까지 학생 신분으로 단속돼 보호소에 구금되거나 강제출국되는 사건들이 되풀이됐다. 2012년 몽골 학생들과 한국 학생들 간의 싸움을 말리던 몽골 청소년 김민우(몽골 이름 빌궁)가 경찰 조사 중 미등록 사실이 밝혀져 출국당한 일(2013년 1월12일 기사 ‘민우의 나라는 어디인가’)이 시행의 계기가 됐다. 국내에서 출생했거나 5년 이상 거주한 아동에게 특별체류자격을 부여하는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안’(이자스민 당시 새누리당 의원 대표발의)이 2014년 제출됐으나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티켓부터 구해 오세요.” 자진출국 신고서를 쓰기 전 심사과 직원이 호준에게 ‘신고의 전제조건’을 설명했다. 몽골의 경우 코로나19로 전면 취소됐던 항공편이 7월1일 출국부터 예매 가능해졌다고 했다. “비행기표를 먼저 끊어 와야 해요. 플라이트 넘버가 지정된 티켓을 가져와야 진짜 출국 의사가 있는 것으로 인정합니다.” 호준이 대기 의자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꺼냈다. 출국신고를 위해 하루 알바를 뺀 호준은 재방문 시간을 아끼기 위해 온라인 예매를 시도했다. 미등록 신분이라 신용카드를 만들지 못한 그를 대신해 이 소장이 결제했으나 ‘에러’가 반복됐다. 한 시간 동안 실패를 거듭한 끝에 휴대전화로 예매 문자(7월14일 출국)가 도착했다. ‘재학생 강제퇴거 유예’ 지침은 ‘지침 밖 아이들’을 만들어냈다. 미취학 아동과 학교 밖 아동,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소년 등은 유예 대상에서 제외됐다.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친 나이지리아 국적 청소년(당시 18살)이 2017년 공장에서 일하다 단속돼 보호소에 구금되기도 했다. 법원이 그의 강제퇴거명령 취소 소송을 받아들였으나 미등록 이주아동·청소년들에 대한 보호 규정 마련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호준도 ‘지침 밖’에 있었다. 2011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퇴거 유예가 종료된 뒤로 그는 쫓기듯 살아왔다.
김호준씨가 6월16일 자진출국 신고를 하러 수원출입국·외국인청 건물로 들어가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몽골 이름으로 졸업증명서 발급
출국 직전까지도 일당 알바 계속
돌아오기 위한 출국 준비 안간힘 끝내 못 돌아오면 어떡하나 불안
재입국 심사 통과해 되돌아와도
더는 호준 아닌 몽골인 이주노동자
“비자 기간만큼은 두렵지 않길” 코로나19로 2월부터 몽골 입국 막혀
호준의 출국도 세 차례 연기 “답답”
바이러스가 멈춰 세운 그의 시간
“빨리 나가야 빨리 돌아올 텐데” ___________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엄마의 표정. 학교 울타리 밖으로 나왔을 때에야 호준은 “그 표정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는 언제나 피곤한 얼굴이었고, 잔소리가 많았고, 사람들을 경계했”다. “엄마가 그때 왜 그런 얼굴을 했고, 그런 말투를 썼고, 그렇게 신경질을 냈는지” 호준은 졸업 뒤 깨달았다. 고등학생 때까지 호준은 자신을 한국인과 구별 지어 생각하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됐다. 엄마는 ‘불법체류 외국인’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에 지쳐 있었다. 엄마가 견뎌온 시선이 성인이 된 호준에게도 달려들었다. “절대, 절대, 누구와도 싸우면 안 돼.” 호준이 어렸을 때 엄마는 말끝마다 당부했다. “경찰 조사라도 받게 되면 바로 쫓겨난다”며 “억울해도 끝까지 참으라”고 했다. 호준은 “항상 눈치 보며 살아야” 했다. “혹시 시비라도 붙을까 봐 사람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참는 데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공장 일을 시작하면서 가슴에 돌덩어리가 박혔다. “처음엔 일을 시켜 준다는 사실만으로 고마웠”다. 노력해도 노력의 대가를 돌려받을 수 없는 현실을 자각하면서부턴 좌절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사실에 몸이 아팠다. 언제부턴가 “화가 나면 목이 땅기고 손이 떨리고 눈이 충혈”됐다. “몸이 말을 안 들어 아침에 못 일어나는 날도 있었”다. “소심해지고 의욕이 사라지고 자신감이 떨어졌”다. 자문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나. “당신 조선족이지?” 10여년 전 연립주택 반지하에 살 때였다. 부엌 창문 앞으로 사람들의 신발이 지나다녔다. 밥을 짓고 있던 엄마를 쳐다보며 한 중년 남자가 조롱했다. 방에 있던 호준이 뛰어나가자 남자가 도망가며 소리쳤다. “조선족, 조선족.” 다음날 집 앞에 쌓여 있던 폐지에서 불이 났다. 호준과 엄마는 남자의 소행으로 짐작했다. 조사 과정에서 미등록 신분이 드러날까 봐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다. 이웃의 신고로 소방차가 와서 불을 껐다. 위험이 닥쳐도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은 호준의 마음에 깊은 불자국을 남겼다. 호준에게 미등록으로 산다는 것은 “기진맥진해지는 일”이었다. 그는 “땅만 보고 걸으며 없는 사람처럼 살아왔”다.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호소할 제도가 없었다. 자진출국을 선택했지만 정말 자진해서 출국하는 것은 아니었다.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무조건적인 강제퇴거를 중단하되 아동 최상의 이익을 고려한 구체적이고 공개적인 심사기준에 따라 적정한 체류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라.” 지난 5월6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법무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고등학교 2학년 ㄱ과 3학년 ㄴ이 작년 12월 낸 인권침해 진정을 받아들였다. “제도가 없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퇴거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고 인권위는 판단했다. 고교 졸업을 앞둔 두 학생은 머지않아 무방비로 노출될 단속의 두려움에 떨며 구제 방안을 호소했다. 인권위가 “제도 마련 전에라도 모든 절차를 활용해 체류자격 부여 여부를 적극 심사하라”고 했으나 지금까지 ‘적극적 조처’는 취해지지 않고 있다. 법무부는 ‘자진출국 뒤 재입국 심사를 받는 방법밖에 없다’는 방침을 고수했다. 졸업하자마자 학교 친구들이 넓은 세상으로 나갈 때 ㄴ은 ‘숨어 살아야 하는 불법체류자’가 됐다. 그는 ‘한번도 가본 적 없고 한번도 내 나라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국가’로 5월 말 출국했다. 법무부가 인권위 권고를 수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호준처럼 ㄴ에게도 남은 시간(자진출국 신고 시한)이 없었다. 그사이 ㄱ도 3학년이 됐고 졸업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법무부는 인권위 권고 90일 안(8월14일)에 공식 입장을 내놔야 한다. “학교 졸업하고 뭐 하셨어요?” 호준이 써낸 ‘체류행적’을 살펴보며 심사과 직원이 물었다. 출입국·외국인청은 입국 첫해인 1998년부터 현재까지 호준이 한국에서 한 일을 연 단위로 적어 내게 했다. “어느 지역에서 일하셨어요?” “부모님이 한국에 계신가요?”…. 한국에서 오래 산 만큼 호준의 출입국 기록과 행적 대조에도 시간이 걸렸다. 한국 생활도 원하는 대로 허락되지 않았지만 자진출국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호준이 ‘자진출국 서약서’에 서명하자 마침내 ‘출국명령’이 내려졌다. 한국 아닌 곳에서의 삶을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에게 체류기간이 못 박혀 통보됐다. 그에게 허락된 한국 생활은 출국 예정일 이튿날인 7월15일까지였다. 그때까지 항공편이 재개되지 않으면 기간을 연장받아야 했다. 얼굴 촬영과 지문 날인을 마지막으로 신고 절차가 끝났다. 지난해 12월11일부터 6월30일까지 미등록 체류자 4만6128명이 자진출국을 신고(법무부 “코로나19로 항공편이 끊긴 상태에서도 제도 시행 전보다 신고 건수 77% 증가”)했다. 신고자 가운데 3만1444명이 6월까지 한국을 떠났다. “이제 한 걸음 뗀 것 같아요.” 심사과를 나온 호준이 다시 깊은숨을 뱉으며 말했다. “내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인생 처음으로 뭔가를 시도했다”는 생각에 호준의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첫걸음을 내디뎠는데 다음 걸음이 낭떠러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쫓아와 얼굴의 웃음기를 지웠다.
수원출입국·외국인청(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건너편에 설치된 법무부의 ‘불법체류 외국인 자진출국제도’ 안내 펼침막.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다만 불안하지 않을 수 있다면 “사장님 안녕하셨어요?” 호준이 사무실로 들어서며 인사했다. 호준의 얼굴을 알아본 사장은 짧은 시간 말이 없었다. 6월24일 비가 왔다. 우산을 쓰고 빗길을 걸으며 호준의 몸이 다시 경직됐다. 전날 밤에도 호준은 “긴장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 아파트형 공장 건물에 호준이 2011년부터 9년 가까이 일한 전자부품 공장이 있었다. 퇴직금을 받으러 가는 중이었다. 지난 3월 공장을 그만뒀을 때 사장은 퇴직금(미등록 노동자에게도 지급 의무)을 주지 않았다. 퇴직금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 않았고 호준도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여기서 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나요?” 일을 구할 때마다 호준이 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실제로 그가 한 질문은 따로 있었다. “여기서 제가 일을 할 수 있나요?” ‘서류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호준이 “엄마를 돕기 위해” 시작한 첫 일은 물류센터와 이삿짐센터 알바였다. 일을 마치고 먼지와 땀투성이가 돼 모임에 가면 깨끗하고 멋진 옷차림의 친구들 앞에서 그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학교 다닐 땐 똑같았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생이 된 친구들과 그는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친구들이 ‘내일채움공제’(중소기업에 취업한 청년이 일정 금액을 붓고 정부와 기업이 공동 적립해 목돈 마련)를 이야기하면 “밤 12시까지 일해도 최저임금을 벗어날 길 없는 외국인”은 끼어들지 못했다. 같은 한국 땅에 살았지만 그만 “다른 세계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불가능한 일들이 친구들은 한국인이란 이유로 너무 쉽게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일을 할수록 호준은 친구들과 멀어졌다. “같이 놀고 같이 공부하고 성적도 비슷했던 친구들 중 어느 한 명도 나처럼 사는 애가 없다”는 박탈감에 연락을 끊었다. “열심히 일하면 나아질 수 있나요?” 호준이 더는 하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렇다’는 답을 들을 리 없다는 사실을 그는 오래전에 알았다. 돌아오기 위해 나가지만 몽골에서 무사히 돌아온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자진출국한 사람들에게 심사를 거쳐 부여되는 재입국 자격은 90일 단기비자(C-3)였다. 호준이 호이준으로 재입국해 한국에서 1년 이상 살려면 현실적으로 고용허가제(E-9)를 통한 이주노동자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이주노동자로서의 삶이 지금보다 나을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다만 “허용된 체류기간만큼은 불안하지 않을 수 있길 바랐”다. ‘비자 있는 사람’이 됐을 때 호준이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운전면허 취득이었다. “돈을 벌어 차를 사면 엄마를 태워 좋은 데 데려가고 싶었”다. 자기 이름으로 휴대전화와 통장계좌도 갖고 싶었다. 계산할 때마다 지폐와 동전을 세는 대신 “다른 사람들처럼 신용카드를 멋있게” 긁고 싶었다. 그조차 몽골에서의 시간이 계획대로 풀렸을 때 가능했다. E-9 비자를 받기 위해 치러야 하는 한국어능력시험엔 자신 있었으나 거꾸로 재입국 절차를 밟는 데 필요한 몽골어와 정보 수집 능력은 크게 부족했다. 숙식은 울란바토르의 외삼촌 집에서 신세를 지겠지만 경제적 도움까지 받을 형편은 아니었다. 외삼촌도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하다 단속돼 외숙모·조카와 한꺼번에 강제출국됐다. 몽골어와 고용허가제 학원을 다니며 최소 6개월 이상 버틸 돈이 필요했다. 징집(몽골은 의무병제)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금형 등을 받을 수도 있었다. 재입국 준비에 드는 돈이 모자라 결국 포기하는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돌아오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돈을 모아서(호준은 출국 직전까지 일당 알바 계속) 나가야 했다. ‘퇴직금을 달라’고 용기를 낸 이유였다. “몽골로 돌아가게 됐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꺼내는 호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장이 말했다. “언제 한번 오겠구나 생각은 했다만.” 퇴직금은 언제 한번 가서 부탁하기 전에 줘야 하는 돈이었다. 한 주, 두 주, 세 주. 매주 한 번씩 세 차례 공장을 방문한 끝에 호준은 퇴직금(약 80%)을 받을 수 있었다. 퇴직금을 가방에 담아 나온 날(7월14일) 그는 다시 큰 숨을 내쉬었다. 그날은 호준의 출국 예정일이었다. 열흘 전 호준은 항공사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고객님의 7월14일 인천 출발 항공편이 운항 사정으로 취소되었습니다.” 대구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던 2월25일 몽골은 한국 항공기의 입국을 3월2일까지 중단했다. 바이러스가 전 지구를 감염시키자 몽골 국가비상대책위원회는 입국 제한 조처를 3월11일→3월28일→4월30일→5월31일→6월30일→7월15일로 계속 연장했다. 다시 잡힌 호준의 출국 날짜는 7월18일이었다.
6월24일 김호준씨가 고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이영아 ‘아시아의 창’ 소장과 함께 모교를 찾아가고 있다. 이문영 기자
거듭 연기되는 출국 “이 졸업장의 학생과 지금 앞에 계신 분이 동일인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죠?” ㅎ고등학교 교감이 호준에게 물었다. 6월24일 호준이 호이준의 이름으로 졸업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모교를 찾았다. 몽골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상상하기 싫은 상황’에도 대비해야 했다. 한국에서의 고교 졸업 학력을 몽골에서도 인정받으려면 몽골 이름의 증명서가 필요했다. 두번째 방문이었다. 처음 증명서 발급을 요청했을 땐 ‘이름을 바꾸려면 주민등록초본을 가져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호준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등록 신분의 졸업생이 출신국 이름으로 증명서를 떼러 온 일은 학교로서도 처음이었다. 학교는 교육청에 문의했고, 교육청은 교육부에 의견을 구했다. ‘졸업생과 발급 신청자가 같은 사람이면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호준이 가방에서 중학교 2학년(2006년) 때 발급받은 재학증명서와 학교장추천서를 꺼냈다. 그때도 호준은 체류자격을 얻기 위해 출국과 재입국 절차를 밟고 있었다. 당시 준비해둔 신원보증 서류가 14년 뒤 재출국 준비 과정에서 그를 도왔다. 서류의 기록과 호준의 생활기록부에 적힌 기록을 행정교사가 대조했다. 2011년 ㅎ고교를 졸업한 학생과 2020년 학교를 찾아온 민원인이 동일인이란 사실이 확인됐다. 2006년 호준은 결국 몽골로 나가지 못했다. 호준의 이름을 지어준 목사와 공항에서 출국심사를 받던 중 출국을 거부당했다. 출입국 담당 직원이 몽골에서 팩스로 받은 아빠 사진을 보여주며 ‘누구냐’고 물었다. 6살 때 본 아빠 얼굴이 마지막이었던 호준은 “모른다”고 했다. ‘어떻게 아빠를 모를 수 있냐’는 다그침에 호준은 울음을 터뜨렸다. 출입국 직원은 ‘이 상태로 나가면 재입국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목사는 항의 끝에 호준을 데리고 공항을 나왔다. 6월30일 세번째 찾아간 학교에서 호준은 호이준의 이름이 박힌 졸업증명서(일종의 개명을 통한 이름 변경)를 손에 쥐었다. 이제 ㅎ고등학교 졸업생 중 호준은 없었다. 호이준이 있을 뿐이었다. 스스로를 “몽골인과 한국인의 중간 사람”으로 여겨온 호준이 호이준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은 몽골인으로 ‘공인’된다는 뜻이었다. 호준에겐 “길러준 엄마가 좋은데 낳아준 엄마와 살아야 하는 상황”처럼 느껴졌다. 이름 바뀐 졸업증명서를 바라보던 그가 선언하듯 말했다. “그래도 나는 호준. 무조건 호준.” 비행기는 계속 뜨지 못했다. 7월18일 운항이 취소되고 8월1일 티켓으로 재발급됐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호준을 한국에 붙잡아두려는 것인지,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을 막으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출국이 미뤄지면 재입국도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출국을 일주일 남긴 23일 결항을 알리는 메시지가 다시 날아왔다. 8월1일 항공권이 취소되고 9월2일로 재발급됐다. 비행기의 날개가 묶일수록 호준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빨리 나가야 빨리 돌아올 텐데.”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한번도 품어본 적 없는” 몽골로 돌아가기 위해 호준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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