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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이름없는 공부방- 봄, 가을, 그리고 겨울이야기

등록 2006-02-26 17:16수정 2006-02-26 20:26

21일 오후 서울 신월동 이름 없는 공부방에 모인 초등학생들이 ‘글쓰기 선생님’ 정미영 교사, ‘학부모 교사’ 최선자·한순구씨 등 아주머니들과 함께 둘러앉아 한 아이가 자작시를 낭송하는 것을 찬찬히 듣고 있다.  김정효 기자 <A href="mailto:hyopd@hani.co.kr">hyopd@hani.co.kr</A>
21일 오후 서울 신월동 이름 없는 공부방에 모인 초등학생들이 ‘글쓰기 선생님’ 정미영 교사, ‘학부모 교사’ 최선자·한순구씨 등 아주머니들과 함께 둘러앉아 한 아이가 자작시를 낭송하는 것을 찬찬히 듣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표지이야기> 서울 신월동 ‘이름없는 공부방’

집 형편이 어려워 부모가 보살필 여력이 미약한 아이들, 놀이터에서 그저 시간을 보내던 아이들을 이웃 아주머니가 보듬었다. 집으로 불러 문제집을 풀게 하고 간식도 주고…. 또 다른 이웃 학부모들도 거들었다. 교회도 교육실을 내줬다.

중학교 국어 교사가 가세하며 서울 양천구 신월동 한 동네 교회에 ‘이름 없는 공부방’이 들어섰다. 방학 특강 때는 50명 안팎이 몰려들어 북적댄다. 이웃 학부모들과 교사가 ‘함께하는 교육’을 펼쳐 온 사연을 들어봤다.

“나도 학원에 다니는데…, 교회 학원.”

21일 오후 서울 양천구 신월4동 서울서부교회의 반지하 예배실. 인근 동네 초등학생들 10여명이 둘러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학원 다니는 사람?” 하고 묻자 “태권도” “피아노학원요”라는 대답들 속에, 한 아이가 주뼛거리며 던진 말이다. 바로 이곳, 이름도 없는 공부방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어째서 ‘교회 학원’이라고 불리게 됐을까?

# 2년전 봄
과일가게 아줌마 방과후 갈 곳 없는 아이들 모으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서 이름 없는 공부방을 마련해 가정 형편이 어려운 동네 아이들을 보듬어 온 정미영 교사와 이웃 학부모들 서삼례·최선자·한순구씨(앞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  김정효 기자 <A href="mailto:hyopd@hani.co.kr">hyopd@hani.co.kr</A>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서 이름 없는 공부방을 마련해 가정 형편이 어려운 동네 아이들을 보듬어 온 정미영 교사와 이웃 학부모들 서삼례·최선자·한순구씨(앞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내 아이만 품을 순 없었죠” = 둘째 혜원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2년 전 봄 어느 날 오후였다. 동네 놀이터 옆 과일 가게를 하는 최선자(34)씨 눈에 아이들이 ‘밟혔다’.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은 그저 내내 놀고 있었다. 할머니와 살거나, 부모가 맞벌이를 해야 하거나, 부모 중 한 명만 있거나, 그 부모마저 일하러 가 집에 없거나…. 집에서 보살필 여력이 미약한 아이들이었다. “내 아이만 챙길 순 없었어요.”

초등 4년이던 큰딸 공부를 도왔고 결혼 전 학원 강사로 뛰었던 경험을 뒷심삼아, 혜원이를 가르치는 김에 동네 아이들 네댓명을 불렀다. 방 두 칸 연립주택의 좁은 방에 책상을 펴고 문제집을 건넸다. 집 형편으로 미뤄, 아마 문제집도 구경하기 힘들었을 아이들도 보였다. 그렇게 평일 오후 서너 시간, 아이들에게 국어나 수학 문제집을 건네 풀게 하고 채점하고, 동화책을 읽혔다. 늦은 오후, 떡볶이랑 귤이랑 간식도 딸아이와 함께 먹였다.

그러기를 몇 달, 소문이 났던지, “그 집 아이도 봐주면 안될까?” “그 애도 가고 싶어 한대” 하는 말들이 꼬리를 물었다.

새 둥지로= 아이들이 일곱을 넘자 최씨 혼자선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 때 기현이 엄마 한순구(37)씨가 가세했다. 기현이도 혜원이와 같은 학년이었다. 한씨도 결혼 전후로 학원 강사로 일했던 경험을 들춰내, 용기를 냈다. “도와주고는 싶은데 장소가 비좁았어요. 책상 두 개를 놓으면 옴짝하기도 힘들었으니까요.” 상훈이 엄마 서삼례(43)씨도 손을 보탰다.

가을, 교회에서 작은 교육실을 내줬다. 탁자가 있고, 의자가 10여개 둘러 있는 네댓 평쯤 되는 공간이었다. 가르치는 내용은 크게 바꾸지 못했다. 아이들은 많게는 스무명 가까이 몰려왔다. 다닥다닥 붙어 앉아도, 되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왜 왔니?” 하면 “혼자니까요”라는 대답이 가슴을 쳤다. 최씨는 어린 셋째를 안은 채 가르쳐야 할 때도 있었다고 했다.

정미영 교사는 공부방에 온 초등2년 수진이가 그려준 이 그림을 소중하게 간직한다고 했다.
정미영 교사는 공부방에 온 초등2년 수진이가 그려준 이 그림을 소중하게 간직한다고 했다.
선생님이 오다= 그해 초겨울, 목동중에서 근무하던 정미영(45) 교사가 이곳 소식을 들었다. 혜원이 엄마에게 “선한 마음이 느껴졌고” 국어 교사로서, 어린이들이 문제집만을 풀면 사고력이 갇힐 수 있다는 걱정도 마음을 재촉했다. 퇴근길, 바쁜 시간을 쪼갰다. 하루 걸러 승용차로 20분쯤 달려와,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현직 교사가 나서니 공부 내용이 확 달라졌다. 중하위층이 많은 이 지역 특성에서 학부모들이 글쓰기 교육까진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말이다.

겨울방학, 정 교사는 특강 프로그램을 짰다. 1월 2주일 동안 오전 3시간 남짓 집중 학습을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50여명이나 몰렸다. 형편이 아주 어려운 아이들 말고도 조금은 괜찮은 집 아이들도 찾았다. 신월4~7동 아이들 가운데는 30분을 걸어서, 또는 어린 동생을 유모차에 태워 오는 아이들도 있다. 공짜이고 교사가 가르치고 또 친구들이 있기 때문일까.

# 그해 가을
입소문 타고 하나둘…동네교회에 ‘새 둥지’ 틀다

영어 실력이 좋은 딸 김푸른샘(15)양도 ‘영어 교사’로 스스로 나섰다. 저학년반과 고학년반으로 나누고, 최씨와 한씨도 도우미로 뛰었다. 푸른샘은 아이들의 수준 차가 너무 나자, 밤을 새다시피 해 세 종류의 수준별 교재를 만들기도 했지만 버거웠다고 돌이켰다.

정 교사는 염창중으로 옮긴 지난해 1학기와 2학기에도 격일로 들러 공부방을 찾는 아이들에게 읽기와 쓰기 수업을 하고, 여름방학 때도 특강을 열었다. 도로공사 때문에 늦게 닿았다가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교육실에 들어섰을 땐 야속한 마음도 치밀었다. ‘힘은 달리고, 돕는 손은 보이질 않고…. 아이들은 방치된 가운데 날로 공부는 뒤떨어지고, 친구들과 대화가 안 되고, 따돌림 당하고, 어느 새 자신감을 잃어 사람들에게 선뜻 다가서지도 못하고…. 자꾸 껴안아달라고 하는 등 문제 행동이 잦아 치료가 필요해 보이는 아이도 있는데….’

중학교에서 리코더를 불 줄 모르거나 그림 그리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아이들이 어떻게 진학했을까 했던 연유가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공부방을 찾은 초등학생들이 책 읽는 것을 김푸른샘양이 지켜보며 도와주고 있다.
공부방을 찾은 초등학생들이 책 읽는 것을 김푸른샘양이 지켜보며 도와주고 있다.
“아이들이 희망”= 그래도 아이들이 힘이 돼 준다고 정 교사는 털어놓는다. 그 동안 해 왔던 일이라고 해야 이렇다 할 것이 없게만 느껴져 “부끄럽고 쑥스럽지만”, 아이들이 조금씩 달라져 가는 모습이 비친다고 했다. 자신의 마음을 주저하지 않고 글로 쓰려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아주 쉬운 문제도 풀지 못하던 아이가 꽤 복잡한 문제도 풀어내기도 했다. ‘봉사하는 이가 더 많은 걸 얻는다’는 걸 재확인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 겨울방학 땐, 딸 푸른샘의 친구 조유정(15)양까지 나섰다. 영어 대신 수학을 맡겼다. 아이들은 저번처럼 50명 가까이 몰려왔다. 푸른샘과 유정이는 “참말로 보람 있고, 재미도 있었다”며 이제 고교에 가면 친구들과 봉사 동아리를 꾸려 방학 같은 때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 그리고 겨울
엄마들·선생님 열성에 아이들 자신감 ‘쑥’

이름을 갖게 될까= 학기부터는 좀더 넓은 교육실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정 교사는 좀더 조직적으로 운영하고 싶다고 했다. 구체적인 장기 대안은 떠오르지 않지만 뭔가를 찾아가야겠다는 거다. 장학금 주기·급식 지원·방과후 수업 지원 같은 도움이 될 손길도 연결해주고 싶다.

그런데, 교사 확보가 관건이다. 전문적 역량을 지닌, 가까운 지역 교사들이 동참했으면 하는 게 간절하다. 마음은 있지만 시간이 없다는, 여유가 생기면 돕겠다는 교사들은 적지 않다. ‘나처럼 40대 중·후반, 자녀가 자라서 부담이 덜한 현직 교사들이 적극 나서주면 좋을텐데….’ 학교의 영상자료도 활용할 수 있는 장비도 아쉽다.

최씨는 이따금 ‘나라에서 해야 할 일인 것 같은데, 내가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한단다. 그런데 집안이 힘든 아이들을 보면 가슴 한 쪽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봉사할 수 있었으면 하는 꿈을 꿉니다. 중학생인 푸른샘 선생님처럼 말이에요. 금방이잖아요? 아이들이 자라는 건. 두세 해 뒤엔 고학년 아이들이 중학생이 돼 저학년 동생들을 돕겠다고 하지 않을까요?”

이 공부방이 예쁜 이름을 갖게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이수범 기자 kjls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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