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국무총리가 1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예결위회의장에서 열린 제400회 국회(정기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 출석,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5년부터 학생들이 배우게 될 ‘2022 개정 역사과 교육과정’ 시안이 지난 30일 공개되자, 보수 언론이 일부 표현을 문제삼아 이념 공세를 퍼붓고 있다. 정부 역시 발빠르게 표현을 수정하겠다고 밝히는 등 호응하는 모양새여서, 국정 교과서 폐기와 함께 일단락되는 듯 했던 해묵은 역사 교과서 논쟁이 재현될 우려가 있다.
<조선일보>는 8월31일치 및 9월1일치 1면 기사에서 잇따라 새 교육과정 시안의 ‘좌편향’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1948년 8월15일을 ‘대한민국 수립’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기술하고 자유민주주의, 남침이라는 표현이 빠져있는 새 교육과정 시안은 ‘좌편향’됐으므로 대폭 수정·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역사교육계에서는 보수 역사학계와 언론의 요구를 담은 박근혜 정부의 ‘국정 역사 교과서’가 친일·독재를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고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폐기된 마당에, 더 이상 소모적인 논쟁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권 바뀔 때마다 대한민국‘정부’수립, ‘자유’민주주의 논란
박래훈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1일 <한겨레>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냐 대한민국 수립이냐는 현재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나 시작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고 쓰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운동과 임시정부를 모두 계승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은 1948년 이전의 임시정부와 항일운동의 역사와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비판이 크지만, 뉴라이트 등 보수 진영에서는 ‘1948년 건국론’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앞서 2009 개정 교육과정까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고 기술해오던 것을 박근혜 정부가 ‘국정 역사 교과서’의 뼈대가 된 2015 개정 교육과정을 개발하면서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바꾼 바 있다.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거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역사 교과서 발행체제는 다시 검정제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고등학교 한국사 교육과정은 2018년 7월 한차례 개정됐고,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도 다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돌아갔다. 새 교육과정 시안은 이때 개정 취지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새 교육과정에 적힌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꿔야 한다는 보수 진영의 주장에 대해서도 박 회장은 “과거 사회주의와의 대립을 강조해 색깔론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있다”고 경계했다. 이명박 정부는 2011년 8월 기존의 민주주의 표현을 모두 자유민주주의로 바꿨다. 당시 역사 교사들은 우리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는 공산주의 체제에 맞서는 대립개념으로 차용된 탓에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 미화에 악용될 수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이후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은 2018년 개정때 교육과정에서 빠지고 대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이 추가됐는데 새 교육과정에는 이 표현도 빠진 상태다.
‘남침’은 상식인데, 표현 빠졌다고 “좌편향”
6·25와 관련해 ‘남침’ 표현이 빠진 것을 ‘좌편향’으로 몰고 가는 것은 교육과정 체계 변화와 학교 현장의 현실을 간과한 ‘과도한 트집잡기’라는 의견이 나온다. 교육부가 검정 교과서 집필진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교육과정에 대한 대강의 줄거리와 기준만 제시하는 ‘대강화 기조'를 강조하면서, 모든 교과에서 전반적으로 해설이 줄었는데 의도적으로 남침을 뺀 것처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6·25가 남침이라는 사실은 수업과정에서 설명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상식인데다, 남침으로 안 썼다고 북침설을 가르칠 교사도 없다.
총리도 차관도 기다렸다는 듯 ‘수정·보완’ 입장
하지만 정부는 보수 진영의 이념 공세에 부응하는 모양새다. 한덕수 총리는 1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국민이 알아야 하는 것과는 괴리가 있다. 자유민주주의, 남침 등이 논의되고 포함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교육부 역시 전날 오후 “시안은 확정안이 아니며 대국민 의견 수렴 등을 거쳐 보완해나가겠다”며 부랴부랴 수습에 나선 데 이어, 장상윤 교육부 차관도 1일 국회에 나와 “공론화를 토대로 수정, 보완하겠다”고 재차 밝혔다. 더욱이 국민 의견 수렴을 이제 막 시작한 상태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남침’ 등 2018년 개정까지 담겨져 있던 표현은 연구진에게 반영하도록 요청하겠다”(오승걸 교육부 학교혁신지원실장)는 발언까지 나온 것에 대해 “교육부가 (연구진에) 가이드라인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박래훈 회장)라는 우려가 나온다. 조한경 역사 교사(시흥 능곡고·전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보수언론 등이) 정치몰이를 하고 있는데 정치권의 외압을 받아 교육부가 대응하기 시작하면 ‘제2의 국정교과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유진 김민제 장현은 기자
y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