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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발달장애인, 뮤지컬로 세상을 날아오르다

등록 2024-01-22 16:18

뮤지컬 극단 겸 교육기관 ‘라하프’
장애학생 학부모 자조모임에서 출발
뮤지컬로 공감·사회성·표현력 키워
기업과 계약 맺어 월급 받는 배우로
“발달장애 학부모들에게 희망 되고파”
라하프가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 뮤지컬 작품 ‘드리머스’. 라하프 제공

지난해 11월 일주일 동안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 뮤지컬 ‘드리머스’는 관객석을 꽉 채우며 감동으로 물들였다. 서정적이고 감동적인 스토리와 세련된 음악, 환상적인 분위기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발달장애인 배우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이 관객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다. “발달장애인 뮤지컬이 5천석 극장을 관객으로 채우는 날이 오다니….” 이 뮤지컬을 이끈 라하프 김재은 단장의 머릿속엔 지난 7년간의 눈물과 웃음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첫 공연으로 국회 대상 받아

라하프의 출발은 나사렛대학교 재활자립학과에 다니는 발달장애 학생들의 부모 모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학과는 국내 유일의 발달장애인(자폐 또는 지적장애)을 위한 학사 과정이다 보니, 이곳에 입학한 자녀들의 원활한 대학 생활을 돕기 위해 부모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학기 중에는 수업도 듣고 친구들과 노느라 바쁘게 시간을 보내지만, 방학 때에는 대부분 집에서 핸드폰만 보며 지내기 일쑤였다. 부모들은 방학 중에도 자녀들을 집밖으로 끌어내 친구도 만나고 상호소통도 이어갈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을까 머리를 맞댔다. 그때 아이들 대부분이 흥이 많고 춤과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뮤지컬을 한번 가르쳐보면 좋겠다’는 결론이 났다.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공간을 빌리고 뮤지컬 감독과 비장애인 배우 등 스태프의 지도 아래 뮤지컬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스태프들이 학생들을 “배우님”이라고 존칭하며 가르치자, 학생들은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하지만 주어진 대사를 외우는 건 쉽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해 이들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본을 다시 썼다. 아이들의 대사 암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그렇게 준비해서 지난 2016년 무대에 올린 첫 뮤지컬 공연이 ‘디스 이즈 아워 스토리: 너는 대학에 갈 수 없어’였다. 100석 관객석을 훌쩍 넘긴 130명의 관객이 박수를 치며 관람했다. 언론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쪽은 ‘장애인 문화 콘텐츠로 뮤지컬을 계속하면 좋겠다’는 격려를 하는데다 이듬해 2월 ‘대한민국 국회대상 시상식’에서 뮤지컬 부문 대상까지 받았다. 이 상은 대중문화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국회가 수여하는 상으로, 당시 박보검, 나영석 피디, 박진영 등이 함께 상을 받았다. 얼마 안 가 평창 패럴림픽에서도 초청 공연을 뛰게 됐다. 아이들도 뮤지컬에 대한 열정을 보이자 지속적인 뮤지컬 활동을 위해서 단체 ‘라하프’를 만들었고, 당시 학부모회 회장이었던 김재은씨가 단장을 맡았다. 라하프는 히브리어로 ‘비상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라하프는 지금까지 ‘더 보이스’ ‘드리머스’ 등의 공연을 올리는 뮤지컬 극단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발달장애인을 뮤지컬 배우로 키워내는 아트칼리지도 운영한다. 국내에서 발달장애인에게 뮤지컬을 가르치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주5일 4년제로 운영되는 아트칼리지에서 학생들은 ‘뮤지컬 연기’ ‘성악’ ‘뮤지컬 탭댄스’ ‘뮤지컬 댄스’ ‘케이팝 댄스’ ‘발레’ 등을 배우며 뮤지컬 공연 때 작은 역할이라도 맡으면서 실력을 키워나간다. 교수진은 단국대 뮤지컬 학과장 등 8명의 전문가들이 맡고 있다. 라하프는 또한 발달장애인의 건강과 취업 등을 위한 영상 프로그램도 제작하고, 직장을 찾아다니며 장애인식 개선 공연도 하고, 발달장애인 예술 전문 강사를 키워 특수학급이나 장애인 기관에 파견하기도 한다.

최근 들어 가장 의미 있는 성과는 라하프가 사회적혁신기업으로 선정돼 뮤지컬 배우들이 기업으로부터 월급을 받는 정규직이 된 것이다. 지난해 장애인 고용 의무가 있는 2개 기업들이 라하프 배우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했고, 이들 배우들은 라하프에서 위탁 근무를 하는 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라하프 아트칼리지에서 학생들은 ‘뮤지컬 연기’ ‘성악’ ‘뮤지컬 탭댄스’ ‘뮤지컬 댄스’ ‘케이팝 댄스’ ‘발레’ 등을 배운다. 라하프 제공

“뮤지컬은 끝없는 상호작용으로 사회성 키워”

방학 중에 핸드폰만 하지 않게 뭐라도 시켜보자고 시작한 뮤지컬이 당당히 돈을 버는 ‘배우’라는 직업으로 연결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연결의 연결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김재은 단장은 “뮤지컬을 통해 감정과 공감, 사회적 소통과 책임감을 배우는 등 생각지 못한 엄청난 성장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대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의 스토리를 말하고 친구의 스토리를 들으면서 감정을 느끼고 공감을 배운다. 뮤지컬은 자신의 차례에 대사를 하지 않거나 이동해야 될 곳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공연이 진행되지 않는다. 각자 자신의 맡은 역할을 책임지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기도 하지만, 혹시 깜빡하면 다른 친구가 알려주기도 하고 손을 잡고 이동해주면서 친구를 챙기는 법도 익힌다. 뮤지컬을 배우러 왔다가 사회성을 더 크게 배우는 것이다.

자폐성 아이들은 상동행동(의미없는 반복적 신체행동)이 많이 줄어들었고, 낯선 사람을 보면 도망가던 아이는 인사를 하게 됐다. 김재은 단장은 “발달장애인은 의사소통이 어렵다 보니 상호작용 기회가 적고 그러다 보니 사회성 발달 기회가 더 줄어들게 되는데, 뮤지컬은 끝없이 합을 맞추는 상호작용 과정이라서 자연스럽게 협동심, 사회성, 표현력 등을 기르게 된다”며 “인지력이 부족한 발달장애인들은 강의식 수업에서는 부족한 걸 채워넣기가 쉽지 않은데, 뮤지컬은 춤과 노래로 교육을 하니까 교육적 효과가 높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뮤지컬 활동을 통해 교육환경이 바뀌면 아이들이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며 “문화예술을 매개로 발달장애인의 사회성 교육을 하는 게 라하프의 중요한 목표”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누구든 뮤지컬을 통해 변화할 수 있도록 라하프는 뮤지컬 대본과 안무 등에 대한 저작권을 무료로 풀어놨다.

라하프 배우인 한소라(28)씨는 “원래는 말하다가 실수하는 게 두려워서 사람들과 말을 잘 못했는데 이제는 수다쟁이로 살고 있다”며 “뮤지컬 배우이면서 발달장애 아이들에게 댄스 등을 가르쳐주는 보조강사로도 일하고 있는데 앞으로 배우와 강사 둘 다 더 재미있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라하프 아트칼리지에 다니고 있는 김나현(22)씨는 “연기에 관심이 있어서 연기 학원을 다녔는데 비장애인 중심이라 그만뒀다”며 “여기서는 비장애인 배우들과도 어울리면서 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배우고 공연도 하니까 좋다”고 말했다.

라하프 제공

“우리 아이도 뮤지컬 단원이라는 첫 꿈 생겨”

보통 자녀가 발달장애 진단을 받는 순간 많은 부모들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앞이 막막해진다. 부모들은 자녀가 ‘직업’이나 ‘일’은커녕 고등학교까지 정규교육이라도 제대로 마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장애인에게도 취업과 일은 매우 중요하다. 꼭 자립이나 생계가 목표가 아니더라도 일을 통해 지속적으로 사회성과 사고력을 키우는 발달의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뮤지컬을 통해 취미와 교육을 넘어 직업까지 연결시키는 라하프의 성취는 많은 발달장애인 부모들에게 희망을 준다. 김재은 단장은 “우리가 매년 공연을 올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발달장애 자녀를 가진 부모들에게 절망하지 말라고, 이렇게 건강하고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려주려는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장나영씨는 겨울방학인 요즘 중학교 2학년인 딸을 데리고 충남 계룡에서 서울을 오가며 라하프 아트칼리지에 다니고 있다. 그는 “딸이 춤과 노래를 좋아하다 보니 라하프의 뮤지컬 공연을 보게 됐는데, 공연을 본 뒤 너무 감동을 받았고 우리 아이도 뮤지컬 단원으로 성장하는 첫 꿈이 생겨 이곳에 오게 됐다”며 “아이가 아직 뮤지컬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자기도 언젠가 언니오빠들과 함께 무대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는 기대감으로 즐겁게 수업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라하프 제공

라하프가 올해 새롭게 창작해서 무대에 올릴 뮤지컬 작품은 3개로 예정돼 있다. 지난 16일 찾아간 서울 홍대 근처 라하프 강의실에서는 홍세정 안무감독과 추태영 작가가 10명의 학생들과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날 대화의 주제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기쁘거나 슬픈 일’이었다. 아이들은 학창시절 겪은 힘들었던 사건을 얘기하기도 했고, 뮤지컬 공연 과정에서 겪은 고생과 감동의 순간을 언급했기도 했다. 올해 무대에 오를 작품들도 학생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본이 쓰여질 예정이다.

한편, 라하프 아트칼리지는 학생들을 수시모집으로 선발한다. 학부모와 학생 면접을 본 뒤 뽑는데, 학부모의 교육철학이 라하프와 잘 맞는지, 오랫동안 라하프와 함께할 수 있는지를 눈여겨본다. 누리집(linktr.ee/theater_lahaph) 참고.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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