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군 치사사건 이후 한달 남짓 동안 노태우 정권의 폭압을 규탄하고 퇴진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항의시위 과정에서 무려 12명의 젊은이가 분신하거나 타살되는 ‘분신정국’이 벌어졌다. 사진은 그해 5월5일 서울 조계사 대법당에서 열린 강경대·김영균·천세용 열사의 천도재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85
1991년 4월27일, 민주단체와 전대협, 신민당 등이 참여해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를 만들었다. 이틀 뒤엔 연세대에서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5만여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강경대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쳤다. 같은 날 전남대에서 열린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 도중 전남대생 박승희가 분신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박정기는 유가협 회원들과 함께 광주로 향했다.
유가족들은 서울과 광주 두 지역으로 나뉘어 병원과 영안실을 지켰다. 5월1일 노동절(메이데이)엔 전국 66개 대학에서 집회와 시위가 열렸다. 박정기는 전남대병원에 머물고 있던 그는 또다시 안동대 학생 김영균의 분신 소식을 들었다.
김영균은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안동인 결의대회’에서 분신 항거했다. 박정기는 박래군·박행순(박관현의 누나) 등과 함께 이번엔 대구로 향했다. 경북대병원에 도착했을 때 전경들이 병원 주변에 깔려 있었다. 병원 출입은 통제되고 있었다. 박정기가 들어서려 하자 전경들이 가로막았다.
“내는 박종철의 애비 되는 사람입니다.”
그 한마디면 어디서든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박정기는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김영균의 병실을 찾아갔다. 김영균은 온몸이 붕대에 감겨 있었다. 얼굴은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위독한 상태였다. 박정기는 김영균의 불에 탄 손을 잡고 부탁했다.
“내는 박종철 애비데이. 희망을 놓지 말그라. 마지막까지 용기를 잃어선 안 된다.”
김영균은 몸을 움직일 수도, 입을 열 수도 없었다. 박정기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그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운명 직전의 눈물이었다. 병실에서 나온 박정기는 박래군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병원 안에도 전경들이 가득했다. 그는 유가족을 수소문했지만 만날 수 없었다. 그를 만나길 꺼리는 듯했다. 학생들은 병원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바깥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미 한 차례 학생들은 무릎을 꿇고 부탁했다.
“아버님, 영균이를 지키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김영균의 아버지는 학생들과 거리를 두었다. 유가족과 소통이 어려운 것을 깨달은 박정기는 박래군에게 채근했다.
“래군이, 이제 그만 서울 올라가자.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더 볼 끼도 없다.”
“아버님,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
박래군의 간청으로 두 사람은 유가족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몇 시간 뒤 김영균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잡은 손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학생들과 유가협은 민주국민장을 제안했다. 하지만 유가족은 기자회견을 열어 장례를 가족장으로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박정기는 경북대병원 노조위원장과 논의하며 대책을 마련했다. 공무원인 김영균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어렵게 마련되었다. 박정기가 호소했다.
“아버지도 공직에 있는 사람 아입니까? 내도 그렇습니다. 내도 아들이 죽었을 때 그 뜻을 모르고 가족장으로 급히 화장해 지금도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있습니다. 영균이를 학생과 시민들이 함께 추모하게 해주십시오. 그것이 그 아의 뜻을 널리 알리는 길입니다. 제발 그라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를 설득할 수 없었다. 유가족이 가족장을 치르려는 의지가 뚜렷한 만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더이상 뜻을 전할 수 없자 박정기는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자리를 함께한 이들이 모두 침통하게 고개를 숙였다.
김영균의 주검은 화장한 뒤 금강에 뿌려졌다. 학생들과 민주단체는 안동대 뒤편 나지막한 산봉우리에 그를 안장했다. 김영균의 아버지는 그 후 1년쯤 지나 학생들에게 사과의 편지를 써보냈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박정기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던 중 라디오 방송을 통해 경원대 학생 천세용의 분신 소식을 들었다. 천세용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결의대회’에서 국기게양대 옆에서 분신한 뒤 몸을 던졌다. 박정기는 택시를 돌려 급히 한강성심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천세용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출발한 뒤였다. 박정기는 다시 세브란스병원으로 차를 돌렸다. 병원에 거의 도착할 즈음 구급차를 발견했다. 박정기는 택시에서 내려 천세용의 상태를 확인했다. 천세용은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도 구호를 외쳤다. 마지막 항거의 몸부림이었다.
사흘 뒤인 5월6일엔 한진중공업의 박창수 노조위원장이 안양병원에서 의문사했다. 이틀 뒤엔 서강대에서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분신했다. 다시 이틀 뒤인 5월10일엔 민주화운동직장청년연합 회원 윤용하가 분신했다. 전국에서 연일 집회와 시위가 열렸다. 시민·학생들과 전경들 사이 공방전은 시가전을 방불케 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희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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