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14일 중단됐다가 18일 다시 진행된 명지대생 강경대군의 장례식 날에도 전남 보성고생 김철수군과 여성 노동자 이정순씨가 분신했다. 5월20일 오전 이씨의 운구행렬이 고인이 투신했던 연세대 정문 앞 굴다리에 멈춰 진혼식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87
1991년 5월8일 김기설이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분신했다. 그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사회부장이었다. 바로 그날 서강대 박홍 총장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성경 위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어둠의 세력이 있다. 죽음의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 이 죽음을 선동하는 세력을 반드시 폭로해야 한다.”
종교인들과 국민들은 민주단체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시위 참여자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검찰은 잇따른 분신 정국이 ‘분신 조직’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며 배후세력을 수사하겠다고 선언했다.
김기설 분신의 배후를 찾던 검찰은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을 유서 대필자로 지목했다. 보수언론은 ‘유서대필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대서특필했다. 강기훈은 부인했으나 유죄판결로 3년2개월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2007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김기설의 필적과 유서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6년 만에 누명은 벗었으나 한 인간의 젊음은 송두리째 파괴된 뒤였다.
검찰은 이 사건을 계기로 무소불위 공권력을 휘두르며 ‘공안정국’으로 몰고 갔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검사들은 지금도 권력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5월14일 명지대에서 고 강경대 열사 영결식이 열렸다. 장례 행렬이 신촌오거리에 도착했을 때 모인 시민은 50만명이 넘었다. 운구차가 이대 앞 사거리에 이르자 아현동 고개에서 경찰들이 최루탄을 난사했다. 서울시청 광장은 87년 이한열과 조성만의 노제가 열린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정부는 시청 쪽 진출을 허용하지 않았다. 운구차는 결국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되돌아왔다.
강경대의 운구차는 나흘 뒤인 5월18일 다시 병원을 나섰다. 이날은 마침 광주민중항쟁 11돌이었다. 전국 81개 지역에서 40여만명이 거리에 나섰다.
장례행렬의 선두가 연세대 정문 앞을 지날 때 박정기는 갑자기 철길 위에서 치솟는 불기둥을 보았다. 불기둥은 곧이어 굴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공안정국 타도, 노태우 퇴진”을 외친 그는 여성 노동자 이정순이었다. 초등학교만 나와 부평 공단에서 일하던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숨졌다.
앞서 이날 오전엔 전남 보성고 학생회 간부 김철수가 운동장에서 ‘5·18 추모행사’ 도중 분신했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그는 유언을 미리 테이프에 녹음해놓았다.
“우리나라 전 고등학교가 인간적인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일어나 투쟁해야 한다.”
강경대의 운구차는 서울역으로 향하다 이번에도 이대 입구에서 경찰에 막혔다. 저녁 무렵 공덕오거리로 노제 장소를 바꾸었다. 그러나 또다시 저지당하자 투석전이 벌어졌다. 박정기는 강경대의 마지막 가는 길마저 막는 공권력을 보며 분노의 망치를 들었다. 그는 보도블록을 깨뜨려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날 그는 손에 물집이 잡힐 만큼 망치질을 했다.
겨우 공덕동에서 노제를 마친 운구차는 휘문고를 거쳐 광주 망월동으로 향했다. 이튿날 새벽 4시가 넘어 광주 톨게이트에 도착했을 때 20개 중대의 전경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광주시내 진입을 막았다. 전경들과 공방전을 벌이던 운구행렬은 저녁 7시가 넘어서야 광주로 들어섰다. 강경대가 망월동 묘지에 묻힌 시각은 이튿날 새벽 4시였다. 강경대의 유가족은 이날 유가협에 가입했다.
5월25일, 박정기는 시위 도중 여대생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민가협의 최진호와 함께 급히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성균관대생 김귀정이었다. 간사 정미경의 가까운 후배로 유가협과도 인연이 있었다.
김귀정은 이날 ‘폭력살인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3차 국민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사복체포조(백골단)를 피하려다 시위대와 함께 퇴계로3가 대한극장 건너편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최루탄 세례 속에 무차별 구타를 당한 끝에 압박 질식사한 것이었다.
박정기는 김귀정의 사망 소식을 알리기 위해 시장에서 야채 노점을 하는 김귀정의 어머니 김종분을 찾아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 김종분은 이미 백병원으로 달려간 뒤였다.
이튿날 새벽 경찰은 세 차례나 김귀정의 주검 침탈을 시도했다. 성균관대 학생들과 시민들은 시신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을지로와 중앙극장 두 방향에서 전경과 백골단이 몰려왔다. 박정기와 유가협 회원들은 영안실을 지켰다.
성균관대 학생들은 병원 앞에서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맞섰다. 병원 안까지 최루탄이 쉼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학생들의 치열한 저항에 전경들이 서서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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