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28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틀 뒤 유가협은 국회 앞 천막농성을 끝냈다. 422일간 풍찬노숙하며 지난한 투쟁을 해온 유가족들이 해단식에서 서로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99
1998년 11월4일부터 차린 유가협의 국회 앞 천막농성장에는 여러 단체들의 연대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홀로 찾아와 투쟁기금을 전달하는 시민도 많았다. 한번은 한 시민이 찾아와 말없이 농성장 안에 봉투를 두고 갔다. 봉투 안에는 현금 100만원이 들어 있었다. 의문사 지회장 허영춘이 급히 나가 그를 붙잡았다.
“선생님, 큰돈이라 저희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존함이라도 알려주십시오.”
“이렇게라도 해야 제 마음이 편합니다. 이름은 알아서 뭐하려고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익명의 기부자는 더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듯 자리를 피했다. 전국농민회의 정광훈 의장은 국회에 볼일이 있으면 반드시 농성장을 찾아왔다. 그는 농성기간 가장 빈번하게 찾아온 사람이었다. 천막 안에서 함께 식사할 때마다 그가 말했다.
“어머니, 여기 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정광훈은 지난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듣던 날, 박정기는 농성장에 찾아올 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그의 선한 웃음이 떠올랐다. 박정기는 농민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영결식 날 몸이 아파 찾아가지 못한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그는 정광훈을 그리워하며 말했다.
“저세상에서 우리가 차려준 밥상보다 더 따순 밥을 먹고 있는지 궁금하데이.”
그 무렵 여의도에선 집회와 시위가 잦았다. 시위라도 벌어지면 대학생들이 전경에 쫓겨 천막 안으로 숨어들어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유가족들은 전경을 쫓아보냈다. 전경들은 빤히 보면서도 학생들을 잡아갈 수 없었다. 한울삶이 그렇듯, 유가협 농성장은 공권력이 침입할 수 없는 ‘소도’ 같은 곳이었다.
그해 가을 정기국회가 끝나고 곧이어 임시국회가 열렸지만 법 제정은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해를 넘겨 99년 1월7일 임시국회마저 성과 없이 막을 내리자 유가족들은 전체회의를 열어 농성을 지속하기로 결의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국회는 의문사법을 제정하지 않고 법무부 의견이 반영된 인권법안을 3월31일에 통과시킬 계획이었다. 인권법은 의문사 진상규명을 불가능하게 하는 법안이었다. 3월29일, 유가협은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 앞에서 인권법안 거부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허영춘·김을선·신정학·최봉규 등 의문사 유가족 7명이 항의 삭발식을 단행했다. 이어 거리행진을 막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던 중 22명이 연행되었다. 박정기와 유가족들은 일주일 뒤 4월6일 새정치국민회의 당사를 기습점거하고 단식농성을 벌였다.
여러 차례 임시국회가 열렸지만 법 제정은 진전되지 않았다. 5월 들어 유가협은 국회 정문 앞에 또하나의 천막을 설치했다. 영등포경찰서장이 해산명령을 내렸다.
“여긴 국회 정문 앞이라 천막을 설치할 수 없습니다. 해산하십시오.”
배은심 회장이 항의했다.
“당신이 누군디 해산하라 마라여?”
“나는 영등포경찰서장입니다.”
서장인 줄 미처 몰랐지만 배은심은 오히려 목소리를 더 높였다.
“나는 유가협 회장이오. 누가 이기는지, 철거할 수 있으믄 한번 해보쇼잉.”
경찰서장은 곤란해할 뿐 철거하지는 못했다. 박정기와 유가족들은 이날부터 또다시 단식에 돌입했다. 지속적인 유가족들의 투쟁에 새정치국민회의는 인권법안을 폐기하고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8월4일 유가협은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마지막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해 여름따라 유난히 삼십도를 훌쩍 넘으며 찜통더위가 계속됐다.
99년 12월28일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과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마침내 통과했다. 농성 420일째였고, 의문사 진상규명 투쟁을 시작한 지 12년 만의 일이었다. 유가협은 이틀 뒤인 12월30일 농성을 해제했다. 기독교회관의 135일 농성이 그랬듯 이번에도 422일의 최장기 농성 기록을 세우며 막을 내렸다. 박정기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유가족들을 끌어안았다.
“됐다. 인자 됐다.”
기나긴 천막생활을 접으며 유가족들은 대낮부터 막걸리를 마시고 해단식을 했다. 강바람을 맞고 매연을 뒤집어쓰며 싸워온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박정기는 국회를 통과한 법이 완벽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법을 개정하기 위한 싸움이 유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완의 승리였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이날만은 마음 놓고 실컷 술을 마셨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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