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연재를 마치며
선택한 운명 아니었으나 거부하지 않고 맞서
목숨 바쳐 일군 민주화, 현정부 역주행에 분노
꽃처럼 스러진 120여명 열사 이름 기억해주길 이 글을 연재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매일 아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라고. 철이가 이 글을 읽는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들이 겪은 적 없는 낯선 애비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아들에게 나는 보수적이고 유교적인 공무원 아버지였다. 대학시절 철이는 여러 후배들에게 고리키의 <어머니>를 선물했다. 구치소에서 출소한 뒤엔 제 어머니에게도 세상을 바꾸는 일에 함께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말을 유언처럼 간직했다. 하지만 자신이 떠난 뒤 애비의 삶을 예감하진 못했을 것이다. 제 삶이 가족에게 영향을 끼칠 거라고, 가족의 삶을 변화시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아들을 잃은 운명이, 유가협을 만난 인연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모르겠다. 내가 선택한 삶은 아니었다. 내게 이 길이 주어졌을 때 물러나지 않았고,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철이가 꿈꾸던 세상을 만들기 전까지 다시는 눈물 흘리지 않겠노라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사람들은 내 이름 앞에 언제나 ‘박종철의 아버지’를 붙인다. 한때 ‘박종철의 아버지’가 아닌 ‘박정기’의 삶과 운동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와 철이의 꿈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유가협 회원들은 우리 단체를 ‘세상에 있어선 안 되는 단체’라고 말하곤 한다. 회장이 되어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서면서도 나는 유가협이 희한한 단체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유가협은 이 땅의 아픔 그 자체이다. 내 나이 예순에 나는 그 아픔을 만났고,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여생을 편안히 보낼 궁리를 해야 하는 나이였다. 나는 내 자식이 성공하고, 내 가족이 행복하길 바랄 뿐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유가협을 만나면서 이 땅의 모든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누군가의 딸·아들이 같은 일을 겪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철이가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뒤 거리에 나온 이름없는 학생과 시민들의 모습을 평생 간직해왔다. 철이의 죽음을 제 아픔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그들을 불러냈을 것이다. 그 연대의 거리를 잊을 수 없다. 연대의 힘은 나를 변화시켰고, 세상으로 불러냈다. 그래서 유가족운동을 하고 인권운동을 하고 민주화운동에 작은 발품 하나를 보탰다. 연대는 세상을 바꾼다. 이웃이 당하는 아픔에 우리가 등 돌리면 언젠가 권력은 우리들의 것을 빼앗고 우리를 짓밟는다. 일제시대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 독재권력을 경험하며 깨달은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도 그동안 우리가 온몸으로 싸워 이룬 것들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되돌리려는 모습을 보며 나는 분노했다. 용산참사가 벌어졌고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 22명의 죽음이 이어졌다. 희망버스가 그렇듯 23번째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연대뿐이다.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합동분향소엔 목숨을 잃은 노동자 22명의 영정이 놓여 있다. 그 많은 시민들이 무심히 지나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분향소의 영정사진을 보고 유가협 벽면에 걸린 120여명의 사진을 떠올린다. 나는 마음속에 이 22명의 영정을 걸어두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음이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6월항쟁 25돌이다. 우리가 연대의 발길을 멈추지 않는다면, 6월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6월은 언제든 다시 돌아올 것이다. 1994년 문익환 목사와 이오순 어머니가 1주일새 세상을 떠난 즈음 어느 새벽녘 나는 아파트 입구에서 쓰러졌다. 목욕탕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아들 종부가 발견해 응급실로 실려갔다. 심근경색으로 보름 동안 입원했다. 그 후 20년 가까이 약을 먹고 있다. 당뇨도 앓고 있다. 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때 의사가 살렸다. 글을 연재하는 중에도 며칠 동안 치료를 받았다. 동지들이 “아버님 건강 어떠세요?” 하고 물으면 “내 나이만치 건강하지”라고 대답한다. 여든다섯의 나는 이제 예전처럼 싸울 힘이 없다. 하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 갈 힘은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세상의 아픈 곳에 미력한 힘을 보태고 싶다. 87년 1월14일 이후 나는 부산 집을 떠났다. 아들이 꿈꿨던 세상을 이뤄내면 객지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3년 전 부산으로 내려갔지만 지금도 집을 나서고 있다. 돌이켜보니 집으로 돌아갈 팔자는 아니었나 보다. 한울삶이 내 집이 되었다. 여든다섯 인생에서 함께한 사람들이 많다. 최루탄 자욱한 거리에서 만난 얼굴들, 우리를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던 청년들, 유가협의 손발이 되어준 후원회원들, 박종철기념사업회와 유가협을 드나들던 사람들. 과분한 관심을 받고 살았지만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지 못했다. 모두 소중한 동지였지만 특별히 배은심 회장을 비롯한 유가협의 어머니 아버지들에게 감사드린다. 유가협 회원들도 이제 나이가 들어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다. 그런데 지금도 길거리에 나서고 있다. 감히 말하자면, 한분 한분 모두 위대한 이들이다. 민주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열사 120여명의 이름을 기억하고 간직해주길 당부한다. 언젠가부터 한울삶에 방문객이 줄어들었다. 누구든지 찾아오면 어머니 아버지들이 차려주는 밥을 나눠 먹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방문해 우리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아갔으면 좋겠다. 25년 전 나는 임진강에서 아들의 유해를 뿌리며 말했다. “철아,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다. 그땐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할 말’을 남기고 말았다. 세상에 남지 않을 수도 있었던 말들이 남게 되었다. 한 사람의 삶을 기록해 남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지난 세월 내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기억에서 사라져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 유가협과 함께한 저항과 연대의 발걸음을 어떻게 다 기억할 수 있겠는가? 다하지 못한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유가족들이 채워줄 것이다.
20년 전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로 글을 맺는다.
“민주화는 공기나 물과 같이 기초적인 것이어서 없으면 모두가 죽는다. 그러나 파수꾼이 없으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오염되고 만다.”
<끝> 전국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 고문/
구술작가 송기역/
사진 김경애 기자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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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유가족협의회 고문/
구술작가 송기역/
사진 김경애 기자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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