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총각(뒷줄 왼쪽 셋째)은 1972년 5월 동일방직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뽑히면서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됐다. 사진은 그때 국내 노조 사상 첫 여성 지부장으로 당선된 주길자 위원장(맨 가운데)과 집행부로, 주씨는 당시 회사 체육관으로 공연을 자주 왔던 코미디언 남보원씨와 75년 결혼했다.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15
1972년 5월초, 이총각은 신정방과(구정방과보다 더 고급 실을 뽑는 공정) 노조 대의원에 입후보했다. 평소에 일도 열심히 하고 힘든 동료들을 도우며 바른말도 잘하는 그의 추천을 모두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총각은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너 같은 사람이 나가서 바른말을 해줘야 한다”며 등을 떠밀었다. 가톨릭노동청년회(지오세) 선배 언니들 역시 대의원의 임무를 강조하며 당연히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 무렵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다지고 있었다. 70년 1월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 조정에 관한 임시 특례법’을 제정해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을 제약하였고, 3선 연임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뜯어고쳐 이듬해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권에 저항하는 세력에 대한 탄압을 한층 노골화했다. 그해 12월에는 국가비상사태와 함께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선포하면서 노조의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제한했다. 이런 식으로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 자체를 아예 무력화시키더니, 결국 72년 11월 비상계엄하에서 통과된 이른바 유신헌법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장기집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모든 국민의 권리가 제한되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려고 하는 어떤 행동도 법에 걸려 유치장이 넘쳐났다. 그럴수록 이에 저항하는 민주세력의 목숨을 건 유신철폐운동도 거세졌다. 한국 가톨릭교회 또한 더욱 깊게 사회문제에 관여하게 된다. 더불어 교회에 대한 탄압도 심해져서 이후 지학순 주교, 함세웅 신부 등 성직자들이 투옥되고 많은 신자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
지오세에서 정양숙 선배 투사의 지도를 통해 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엄혹한 정치상황에 대해 조금씩 정보를 얻고 의식이 성장해가던 총각에게 자신의 공정을 대표해서 대의원을 해야 한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보다도 그토록 중차대한 임무를 잘 수행해내지 못하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이 더 앞섰다. 한편으론 지오세 선배들이 있고 자신을 격려해주는 동료들이 있으니 소신대로 하면 되리라는 자신감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제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어용노조를 바꾸고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찾기 위해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한편 조화순 목사가 이끌었던 도시산업선교회(산선) 내 소그룹 활동이 생활 중심의 이야기 나눔에서 점차 공장에서의 부당한 대우에 관한 토로로 이어지자, 산선은 실무자 회의를 통해 노동문제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공장 실태조사를 하고, 노동법과 노동조합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다. 이 소그룹 활동에 참여했던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현재 노조가 노동자들을 대표하지 않고 몇몇 간부의 개인적 욕심을 채우며 회사와 타협하는 어용노조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도록 여성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노조를 구성하자고 뜻을 모았다. 그에 따라 노조에 대한 교육과 더불어 여성문제에 관한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노동자들의 삶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길들여졌던 소극성과 체념하는 태도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산선에서는 이에 대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 진행했다.
점차 자신감을 갖게 된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대의원선거를 통해 새로운 노조를 구성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노조 위원장(섬유본조의 지부장) 선거가 회사에서 내세운 인물을 뽑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자신들을 대변할 수 있는 노조를 만들기 위해 먼저 대의원을 잘 뽑아야 했다. 이 모든 상황은 회사 모르게 진행되었다. 마침내 모두의 기대를 안고 치러진 대의원선거 결과 당선자 41명 가운데 29명이 여성이었다. 그중 80%인 24명이 지오세와 산선에서 교육받고 추천된 후보들이었다. 총각도 당당히 뽑혀 그 한자리를 차지했다.
구술정리 박민나
<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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