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수 교육부 대학지원실장(오른쪽)이 20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장학재단에서 사학개혁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인 정대화 교수(가운데) 등 상지대 교수 4명과 학생회장을 만나려고 회의실로 들어서고 있다. 정 교수 등은 사학 비리로 물러났던 김문기씨가 상지대 총장에 선임된 것에 반대하는 뜻을 한 실장한테 전달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상지대 ‘분규 사학’ 만든 김문기는…
‘사학비리’의 상징적 인물이 된 김문기(82)씨는 자기가 강원도 원주시 상지대의 ‘설립자’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진짜 설립자는 원홍묵씨다. 2004년 대법원이 그렇게 판결했다. 원씨는 김씨가 권력의 힘을 빌려 강압적으로 빼앗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김씨는 고향 강릉에서 강릉상고에 입학했고, 60년대에 건국대 법학과에 입학했다고 밝혀왔다. 하지만 김씨가 강릉상고를 졸업했는지가 공식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많았다. 허위 학력 의혹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김씨는 1972년 상지대 전신인 원주대학에 문교부 임시이사로 파견되기 전까지는 상지대는 물론 교육계와도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에 ‘대패 하나’ 달랑 쥐고 상경해 나름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로 그려진다. 서울에서 가구점 직원으로 시작해 가구점 사장이 됐고 40살이던 1972엔 상호신용금고 창설자가 되는 등 재력가로 거듭났다.
김씨는 72년 상지대 임시이사가 된 뒤엔 직접 이사장에 올라 친·인척들로 족벌 체제를 구축하고 대학 운영 전권을 틀어쥐었다. 등록금 등을 활용해 60만평에 이르는 부동산 왕국을 일구고, 독재 정권 언저리에서 여당 국회의원도 여러 차례 지냈다. 그러나 금품을 받고 부정 입학을 허용하고, 교비를 횡령하는 등 범죄를 저지르다 교수·학생·직원들의 항의 끝에 징역형을 선고받고 교육계에서 퇴출됐다. 그의 범죄 행위는 ‘사학비리의 종합세트’로 불릴 정도였다. 김씨는 끈질긴 소송과 학내 갈등 유발 끝에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교육부와 여당의 두둔 속에 42년 만에 상지대 총장까지 맡겠다고 나섰다. 상지대 교수·학생·교직원들이 꾸린 비상대책위원회 자료와 김씨가 구속된 1993년 언론 보도, 법원 판결문 등을 보면, 그가 어떻게 상지대를 ‘분규 사학’으로 만들고 위기에 빠뜨렸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가구점·상호신용금고 운영
민관식씨 선거 돕다 정계에 발 닿아
1972년 상지대 임시이사로 시작
이사장 된뒤 친인척 학교 요직 앉혀
부정입학 등 비리…학교투자엔 인색 독재정권서 세차례 국회의원 지내
‘정권 밀착’ 전횡 일삼다 교육계 퇴출
문민정부때 ‘사정1호’로 지목 수감 ■ 상지대 이전의 김문기 1932년 강원도 강릉에서 난 김문기씨는 14살 때 상경해 서울 인사동 ‘빠고다가구’ 종업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48년 3월 강릉상고(현 강릉제일고)에 입학했고, 한국전쟁 시기에 입대해 헌병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61~65년 건국대를 다녔다. 그러나 고교 생활기록부에는 성적 기록 없이 “1990년 6월 추가 졸업”이라고만 적혀 있다. 고졸 학력이 분명히 확인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김씨한텐 ‘허위 학력’ 논란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60대 후반 포마이카(호마이카) 가구 인기 열풍을 기대 가구를 정부에 납품하며 부를 키웠고, 국회의원에 출마한 민관식씨 선거운동을 도우며 정계에 발을 디밀었다. 72년 문교부 장관이던 민관식씨가 원주대학 임시이사로 김문기씨를 파견했을 때는 가구회사 사장, 춘천 상호신용금고 사장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원래 원주대는 지역인사인 원홍묵씨 주도로 1955년 관서대의숙을 세웠다가 1963년 4년제 야간대로 개편하며 설립한 대학이다. 73년 현재 4000여평 터에 연건평 1500평인 2층 건물(시가 30억원)에서 5개 학과 1000여명이 다니던 문제 없는 사학이었다. 그런데 문교부가 감사를 벌여 대학 시설 기준 미달 판정을 한 뒤, 임시이사로 민 장관과 인연이 있는 김문기씨를 ‘낙하산’으로 내려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 김문기의 상지대 장악과 사학비리 김문기씨는 74년 이사장이 되며 상지대 운영권을 넘겨받았다. 문교부 장관이던 민관식씨의 비호와 압박 속에서 원주대 운영권을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넘겨줬다고 원홍묵씨는 증언한 바 있다. 김문기씨는 상지대 재단 이름을 청암학원에서 상지학원으로 바꾸고, 상지대로 교명을 바꿔 개교했다. 자신이 ‘상지대 설립자’라고 주장하지만, 상지대 법인은 원홍목씨가 설립자이고 운영권만 이전됐을 뿐이라는 사실이 2004년 대법원 판결로 확정됐다.
김씨는 상지대 운영권을 ‘인수’한 뒤론 가족과 친·인척들로 ‘족벌 사학 체제’를 공고히 했다. 아내(이사), 사위(총장 비서실장), 매제(전문대학장), 8촌(교무과장·한방병원 총무과장), 문중 인사(회계·서무과장)들로 대학 재정을 다루는 회계·운영 부분 요직을 장악했다. 그러곤 마음먹은 대로 교비·채용 등을 좌지우지했다. 78년부터 무려 15년 동안 이사회를 한 차례도 열지 않았다. 허위 이사회 회의록을 남겨 눈속임했고, 교육 당국은 이를 눈감아줬다.
김씨는 상지대 인수 뒤 족벌 체제를 무기 삼아 축재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74년 원주대 인수 뒤 기존 교수들을 모두 해직시키고 호봉을 깎았다. 89년부터는 교수를 신규 채용하며 봉급 포기 각서, 날짜를 적지 않은 사직서, 이사장 충성 맹세 서약 따위를 요구하는 전횡을 일삼았다. 학생 등록금과 부정입학 따위로 챙긴 돈 등으로 부동산 투기에 나서 60만평 규모의 ‘부동산 왕국’을 세웠다. 상지대 주변인 원주시 우산동 일대, 대관령축산고 인근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자택이 있던 서울 종로구 숭인동 일대, 빠고다가구 근처 인사동 등 전국 72곳의 대지·전답·임야를 마구 사들였다. 다른 사람 명의로 매입하되 ‘근저당 설정’을 해두는 편법을 썼다. 93년 국회의원 재산신고 당시 185억여원을 신고해 집권당 의원 가운데 3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일로 김씨는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고, 결국 김영삼 정부 ‘사정 1호’로 감옥에 갇혔다. 교육부 고위 간부가 자신의 땅을 김씨한테 팔아넘겨 ‘변칙 뇌물’ 논란이 일기도 했다.
김씨는 독재 정권의 힘을 자신의 뒷배로 최대한 악용했다. 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의 ‘거수기’ 노릇을 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을 지냈고, 80년대엔 전두환 독재 정권이 들어선 뒤로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 등 여당 국회의원을 세 차례 지냈다.
부정 입학, 교원 채용 부정 등 학내 비리에 항의하는 교수·학생들한텐 ‘탄압’으로 일관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86년 용공조작 사건이 대표적이다. 강사 채용 때 금품을 요구하는 등 학내 비리에 학생들이 교내 농성으로 맞서자, 학교 경비원들을 시켜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리고는 이 유인물을 학생들이 뿌린 것처럼 몰아갔다.
상지대를 자신의 전유물로 만든 뒤로 학교 투자에는 인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김문기씨는 상지대 운영에 사재 180억원을 투자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김씨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재단 전입금은 90년엔 3000원뿐이었고 92년엔 한 푼도 없었다. 그가 사학비리로 구속된 93년 당시 상지대 도서관에는 구독하는 정기간행물이 한 권도 없었다. “도서관 비치용으로 청계천 등지에서 헌책을 무게로 달아 사들여왔다”는 교수들의 증언이 나올 정도였다.
김씨는 부정 입학, 교비 횡령, 교원 재임용 탈락 등 비리를 규탄하는 구성원들의 장기 농성·집회 끝에, 김영삼 정부 들어 ‘사정 1호’로 지목돼 사학비리 범죄로 감옥에 갇히며 상지대는 물론 교육계에서 쫓겨났다.
■ 김문기의 상지대 재장악 김씨는 1년8개월 만에 감옥에서 나온 뒤 쉼없이 상지대 복귀를 노렸다. 상지대 교수·학생·교직원들이 그새 김찬국·한완상·강만길·김성훈 총장 등을 영입해 학교의 안정·정상화에 힘쓰며 ‘민주대학’으로 거듭나는 동안, 김씨는 각종 소송은 물론 ‘위력 행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김씨가 94년 “임시이사 파견을 취소하라”며 교육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1999년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김씨가 ‘알박기’ 해둔 교내의 일부 땅에 건물을 짓겠다며 2001~2002년 팻말을 세우고 철제 빔까지 쌓아둔 사건은 지금도 회자된다. 그가 학생 교육·육성보다 자신의 재산과 이권을 앞세우는 인물임을 극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어서다. 그는 재단의 교육용 재산인 연구실습용 토지 6만여평에 자리한 시설물을 철거하라는 소송을 내 분쟁을 일으켰다. 지금의 상지대 정문은 상지대 재단이 법원에 땅값을 공탁하고 수용한 뒤인 2007년에야 세울 수 있었다. 김씨는 정문·후문 인근에 주택·건물을 사들여 학교 구성원들을 비난하는 펼침막을 내거는 ‘엽기적인 행동’을 상지대에서 쫓겨난 시기 지속해왔다.
김씨는 차남 등이 상지대에 복귀한 이후인 2011년에도 공금 횡령 등 계속되는 추문에 휩싸여왔다. 2011년 3월 금융위원회는 김씨가 은행장이고 큰아들 김성남씨가 부행장이던 강원상호저축은행을 감사해 경비 부당 지출 등 불법 사례를 적발해 3억206만원을 환수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1년 5월 여야 국회의원 등 16명한테 불법 정치자금 6900만원을 건넨 혐의로 김씨와 성남씨를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김씨 쪽 이사들이 이사회를 파행으로 몰아가고, 교육부와 구성원들이 추천한 이사들은 교육부의 방조에 항의해 지난 3월 사퇴했다. 마침내 이사회를 재장악한 김씨는 보란듯이 학교 설립자인 원홍묵 흉상을 기습 철거했다. 이사 연임 제한 규정을 삭제하는 등 정관을 개정해 자신이 전권을 휘두르던 과거 ‘김문기 왕국’으로의 복귀를 시도하고 있다.
이수범 기자 kjlsb@hani.co.kr
민관식씨 선거 돕다 정계에 발 닿아
1972년 상지대 임시이사로 시작
이사장 된뒤 친인척 학교 요직 앉혀
부정입학 등 비리…학교투자엔 인색 독재정권서 세차례 국회의원 지내
‘정권 밀착’ 전횡 일삼다 교육계 퇴출
문민정부때 ‘사정1호’로 지목 수감 ■ 상지대 이전의 김문기 1932년 강원도 강릉에서 난 김문기씨는 14살 때 상경해 서울 인사동 ‘빠고다가구’ 종업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48년 3월 강릉상고(현 강릉제일고)에 입학했고, 한국전쟁 시기에 입대해 헌병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61~65년 건국대를 다녔다. 그러나 고교 생활기록부에는 성적 기록 없이 “1990년 6월 추가 졸업”이라고만 적혀 있다. 고졸 학력이 분명히 확인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김씨한텐 ‘허위 학력’ 논란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60대 후반 포마이카(호마이카) 가구 인기 열풍을 기대 가구를 정부에 납품하며 부를 키웠고, 국회의원에 출마한 민관식씨 선거운동을 도우며 정계에 발을 디밀었다. 72년 문교부 장관이던 민관식씨가 원주대학 임시이사로 김문기씨를 파견했을 때는 가구회사 사장, 춘천 상호신용금고 사장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원래 원주대는 지역인사인 원홍묵씨 주도로 1955년 관서대의숙을 세웠다가 1963년 4년제 야간대로 개편하며 설립한 대학이다. 73년 현재 4000여평 터에 연건평 1500평인 2층 건물(시가 30억원)에서 5개 학과 1000여명이 다니던 문제 없는 사학이었다. 그런데 문교부가 감사를 벌여 대학 시설 기준 미달 판정을 한 뒤, 임시이사로 민 장관과 인연이 있는 김문기씨를 ‘낙하산’으로 내려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김문기는 누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