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박수진 사회에디터석 24시팀 기자
반갑습니다. 한낮 열기만큼 뜨거운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에서 인사드리는 사회부 24시팀 박수진입니다. “24시간 동안 일하는 팀인가요?”라는 질문을 수시로 받고 있는데요. 진실은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겨두겠습니다.
최근 ‘이화의 난'을 지켜보면서 그동안 기사에는 언급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보려 합니다. 혹시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그간의 과정을 먼저 소개해볼게요. 이화여대가 교육부의 지원을 받아 직장인 대상 단과대학인 ‘미래라이프 대학’을 설립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학내 커뮤니티인 ‘이화이언’엔 학생들의 반발과 우려가 쏟아졌습니다. 교육부의 재정지원 사업에 대학이 매몰됐다는 지적부터 “학벌 세탁” “이대 급 떨어진다” 등 학벌주의에 호소하는 문구도 눈에 띄었습니다. 게다가 최경희 총장의 독단적인 학교 운영에 학생들의 불만이 쌓여 있던 터라, 단과대학 설립 계획은 점거농성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농성 이틀째인 지난달 30일 “총장님과의 대화”를 기다리던 학생들이 마주한 것은 1600여명의 경찰 병력이었습니다. 많은 현장을 취재하지만 학내에 경찰 병력이 들어온 건 처음 보는 일이라, 학생들과 똑같이 당혹스러웠습니다.
격앙된 분위기 틈에서 오후 6시쯤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재학생으로서 단과대학 사업 문제에 반대하기 위해….” 한 학생이 마이크를 들자, 이를 지켜보던 학생들은 ‘운동권’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 학생의 발언을 막았습니다. “운동권 학생 발언 반대한다”거나 “배제해”라는 성토가 쏟아졌고, 이 학생은 결국 발언을 포기했습니다. 학생들은 서로를 ‘벗’이라고 부르면서도 ‘순수한 이화인’의 의도가 변질된다는 이유를 내세워 ‘운동권’으로 지명된 학생들을 투표에 부쳐 농성장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이화여대 곳곳에는 “미래라이프 반대 시위는 어떠한 정치색을 띤 ‘외부세력’과도 무관합니다”라는 문구가 붙었습니다. 농성 과정에서 이화여대 학생들은 타 대학들의 연대집회도 거절했습니다. 정치권이 내민 손도 잡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화인의 목소리’라는 문구를 앞세웠고, ‘순수성’을 강조했습니다. 최 총장도 기자회견에서 “(시위 학생들을 향해) 마스크와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우리 학생들 같지 않다”는 발언도 했습니다.
오찬호 사회학자는 “보수언론에 트집 잡히지 않으려고 학생들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는 경향이 강했고, 시위 주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운동권이나 외부세력 빼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합니다.
그동안 보수언론과 정권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사드 부대 배치 지역으로 결정된 성주 주민 등에게 쏟아냈던 ‘외부세력’ 프레임에 대한 공포를 학생들이 고스란히 느끼고 있던 겁니다. 학생들이 느꼈을 공포를 헤어려보고 싶어 이화여대 언론팀에 메일을 보내 ‘운동권’ 학생을 배제한 이유와 학생들이 생각하는 ‘외부세력’에 대해 물었습니다.
“시위의 본질에 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시위는 느린 민주주의로, 모든 사람의 의견을 반영하는 데에서 기초합니다.” 짧은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본관 농성장 인근을 지날 때마다 발언 기회를 빼앗긴 학생의 얼굴이 겹쳐집니다. 또 다수의 의견을 따르지 않으면 질타를 당하는 분위기는 아쉽게도 학생들이 생각하는 ‘느린 민주주의’의 ‘오점’ 같아 보입니다.
물론, 방학 중임에도 학내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였고, 토론 끝에 시작한 농성 일주일 만에 ‘미래라이프대학 사업 철회’라는 결과도 얻어냈습니다.
20대를 지나오면서 ‘승리의 경험’을 가져보지 못한 제 또래(30대) 친구들은 언제부턴가 깊은 무기력감에 빠져 있습니다. 이대 학생들은 섣불리 승리를 자축하지 않았고, 대학이 어떤 모습을 지켜나가야 하는지 끊임없이 토론했습니다. 또 자신들을 믿고 지지해준 교수와 교직원, 졸업생들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취재진이 보낸 질문 메일도 일일이 토론을 거친 뒤에 5~6시간 만에 답을 보내주는 느릿느릿한 소통도 ‘원칙’처럼 지켜가고 있습니다. ‘이화의 난’의 결말이 아직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라 조금 복잡한 마음으로 이 글을 매듭짓습니다. 이후 알찬 기획기사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참, 제보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jjin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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