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14일 제20회 ‘하날세’ 행사에 참여한 전남사대부고와 부산사대부고 1학년 학생들이 국립5·18민주묘지 참배를 마친 뒤 추념문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매년 하날세 행사에는 두 학교 교장이 아이들과 동행한다. 이미화 전남사대부고 교사 제공
“홈스테이한 친구 집 할머님께서 아침으로 남도식 김치찜을 만들어주셨어요. 그 ‘전라도의 맛’이 너무 기억에 남아요.”
부산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이하 부산사대부고)
1학년 정다은양은
지난 7월13~14일 전남 광주에 다녀왔다. 친구와의 만남을 위해서다. 이 기간 광주로 떠난 건 정양뿐만이 아니다. 같은 학교 29명이 광주의 역사와 문화, 경제에 대해 공부한 뒤 전남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이하 전남사대부고) 친구들 집에서 1박2일 동안 홈스테이를 했다. 부산에 사는 이들이 광주까지 간 이유는 뭘까?
지역색·편견? 우린 그런 거 모릅니다
광주시와 부산시, 호남과 영남의 고교생들이 이렇게 친목을 다지는 건 ‘하날세’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하날세란 ‘우리는 하나일세’의 줄임말로, 영호남 두 학교 1학년 학생들이 번갈아 가며 매년 양쪽 지역을 교차 방문하는 문화 교류 및 화합 도모 행사다. 올해로 행사 시작 20년. 기관이나 단체가 아닌 국내 단위학교 교류 행사로는 유례없이 역사가 길다.
하날세는 1998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뒤 그 이듬해부터 시작됐다. 1990년대는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담론이 활성화된 때다. 1997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을 포함한 12개 단체가 ’민주시민교육포럼’을 결성했고, 1999년에는 민주개혁국민연합을 포함한 30개 단체가 ’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를 만드는 등 시민 교양, 화합, 환경과 통일 교육 등이 학교 현장으로도 서서히 새싹을 내밀었다. 교단에서도 지역감정 등 구시대의 잔재에서 벗어나자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날세는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시작돼 20년 동안 영호남 학생들이 우정을 ‘대물림’하는 문화를 보여줬다. 학생들은 각 지역 관광지 방문에 그치지 않고, 역사·문화·경제·지리·사투리까지 조사·발표하며 뜻깊은 시간을 갖는다. 청소년들만의 화개장터인 셈이다. 뉴스 속 여야당 국회의원들이 의장석을 가운데 두고 몸싸움을 하는 모습,
선거철만 되면 ’색깔론’ 운운하며 불거지는 지역감정 등 일반적으로 어른들 사이에서는 ‘영호남은 다툰다’는 편견이 있지만, 학생들은 ‘우리는 그런 거 몰라요!, 그거 어른들이 만들어낸 거잖아요!’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지난 7월14일 제20회 ‘하날세’에 참여한 부산사대부고와 전남사대부고 1학년 학생들이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을 둘러본 뒤 모둠별 사진을 찍고 있다. 이유진 부산사대부고 학생 제공
광주·부산 오가며 매년 추억 만들고 있죠
이번 하날세 행사는 부산사대부고 1학년 학생들이 광주로 찾아오는 여정이었다. 지난해에는 전남사대부고 학생들이 부산을 찾아 바다 요트체험을 하고 부산유엔기념공원 등을 방문했다. 한 해는 광주가 부산으로, 한 해는 부산이 광주로 오가며 교류하는 식이다.
특히 올해 하날세 행사는 처음으로 1박2일 홈스테이 방식을 택했다. 전남사대부고 쪽에서 학생들 가정 가운데 홈스테이 가능한 집을 신청받았고, 이 행사에 뜻을 모은 전남사대부고 학부모들이 각자의 집을 학생들의 추억 공간으로 내줬다.
지난 7월13일. 광주 학생들은 부산에 대해, 부산 학생들은 광주에 대해 조사한 것을 발표하는 시간으로 진행했다. 학교별 30명이 5명씩 모둠을 꾸려 총 6개 주제로 부산과 광주 이야기를 풀어냈다. 각 도시의 사회·경제, 역사, 문화, 관광지 등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며 낯선 분위기를 부드럽게 녹였다.
“부산이 우리나라 제2의 도시래요. 인구가 350만명에 달하고요. 한국전쟁에서 싸워준 유엔 참전용사를 위한 기념공원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만다꼬’(뭐 한다고)라는 부산 사투리도 입에 착 붙어요.”(전남사대부고 유주희양)
“광주는 ’인권 도시’라고 할 수 있어요. 동학농민운동부터 4·19혁명, 5·18민주화운동까지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진짜 미래도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광주가 한국 최초 자동차 생산 도시라는 것도 알게 됐고요.”(부산사대부고 김미진양)
이날 ‘광주의 문화’에 대해 발표한 이유진양(부산사대부고)은 “입학하면서부터 선배들이 하날세의 의미와 교류에 대해 설명해줘서 꼭 참여해보고 싶었다. 전남사대부고 급식을 함께 먹고, 교실도 둘러보며 학교생활 이야기를 자연스레 하다 보니 금방 친해졌다”고 전했다. “살고 있는 도시 이야기뿐 아니라 진로, 학습 등 고교 1학년으로서 서로 고민하는 지점들이 같으니 1박2일이 참 짧게 느껴졌습니다.”
모둠별 발표를 마친 학생들은 저녁 식사 시간을 통해 ‘홍어삼합’ 등 특색 있는 음식을 맛보기도 하고 ‘자갈치 시장’에 대한 에피소드 등을 나눴다. 김종근 전남사대부고 교장은 “아이들이 부산과 광주, 서로의 식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이를 좁혀갔다. 애향심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 대한 관심도 커졌고, 흔히 온라인상에서 회자되는 지역색, 편견 등을 허물어가는 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두 학교의 단체사진.(사진 위) 지난 7월13일 제20회 ‘하날세’ 행사에서 두 학교 학생들이 광주와 부산의 사회·경제·문화·역사 등에 대해 각각 조사해온 내용을 모둠별로 발표하고 있다. 이미화 전남사대부고 교사 제공
친구들 위해 직접 ‘광주 투어’ 일정 짰어요
행사 이튿날인 7월14일에는 60여명의 학생들과 지도교사가 모두 모여 ‘국립5·18민주묘지’(이하 민주묘지)를 참배했다. 정다은양은 “굉장히 더운 날 민주묘지를 찾았다. 버스에서 내리니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리고 있었다. 민주묘지가 생각보다 커서 긴장도 됐고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며 “학생들 모두 국화 한 송이를 헌화하며 참배했다. 근현대사 책에서 배운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라고 했다.
전남사대부고 학생들은 부산사대부고 친구들을 맞이하기 위해 ‘광주광역시 자유 투어’ 일정도 직접 짰다. 양재은양은 “부산에서 오는 친구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어 시티투어 일정도 직접 짜봤다”며 “‘증심사→의재미술관→전통문화관’ 등의 코스를 선정한 뒤 각 장소에서 무엇을 설명해주면 좋을지, 맛집은 어디인지 등을 조사하는 시간이 무척 즐거웠다”고 했다. “평소 ‘부산’하면 해운대 등 관광 명소를 많이 떠올렸는데, 국제 항만·물류 도시라는 것과 한국전쟁 당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유입됐다는 사실, 무역 규모도 알게 됐어요. 내년에는 후배들이 부산사대부고에 갈 텐데, 벌써부터 후기가 기다려집니다.”
지난 7월14일 제20회 ‘하날세’ 행사에 참여한 전남사대부고와 부산사대부고 1학년 학생들이 국립5·18민주묘지 참배 중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사진 위) 같은 날 두 학교 학생들이 국립5·18민주묘지 참배 중 헌화를 하고 있다. 이미화 전남사대부고 교사 제공
민주묘지 참배를 마친 학생들은 무등산을 오른 뒤 송정시장,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광주 폴리, 첨단과학관 등을 방문하며 친목을 다졌다. 양재은양은 “부산 친구들을 직접 안내하며 사는 곳에 대한 애정도 커졌다. 하날세와 같은 지역 교류 행사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번에 저는 부산지역에 대해 피피티 발표를 했어요. 조원들과 힘을 합쳐 자료조사를 하다 보니 부산을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하날세에서 만난 부산 친구도 ‘상상 속 광주’가 아닌 ‘인권의 도시, 광주’라는 말을 해주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김지윤 기자 kimjy13@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