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기숙사 청소노동자들이 치러야 했던 필기시험. 청소 업무와 무관한 기숙사 개관 연도, 한자·영어 시험을 봐야했다. 민주노총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제공
지난달 26일 서울대 기숙사 휴게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ㄱ(59)씨를 비롯한 청소노동자들이 서울대 기숙사 안전관리팀의 ‘직장 내 갑질’에 시달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노조와 ㄱ씨의 동료들은 안전관리팀 관리자가 청소노동자들에게 업무와 상관없이 건물명을 영어와 한자로 쓰는 시험을 치르게 하고 점수를 공개해 모욕하는 등 갑질을 했다고 폭로했다.
민주노총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은 7일 낮 12시 서울대 행정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ㄱ씨의 죽음은 사회적 죽음이다. 이 사회의 저임금 청소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비극이기 때문”이라며 “직장 내 갑질을 자행하는 관리자들을 묵인하고 비호하는 서울대는 ㄱ씨 유가족분들께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특단의 조치를 마련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달 26일 밤 11시께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기숙사 휴게실에서 청소노동자 ㄱ(59)씨가 숨진 채 발견된 뒤, 노조는 동료 청소노동자 등과 면담·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지난달 1일 새로 부임한 서울대 관악학생생활관(기숙사) ㄴ안전관리팀장 등이 청소노동자에게 ‘직장 내 갑질’을 해왔다는 정황을 확인했다고 노조는 밝혔다.
노조 조사결과를 보면, ㄴ팀장은 매주 한 차례 청소노동자 회의를 진행하면서 볼펜과 수첩을 가져오지 않으면 인사평가에서 1점을 감점했다. 또 “남성은 정장 또는 남방에 멋진 구두, 여성은 최대한 멋진 모습”으로 회의에 참석하라는 ‘드레스코드’를 지시하기도 했다. 청소노동자들이 근무시간인 평일 오후 3시반부터 진행되는 회의에 작업복을 입고 참석하자 ㄴ팀장은 노동자들의 인사평가에서 또 1점을 감점했다고 노조는 밝혔다.
게다가 ㄴ팀장은 청소노동자들에게 청소 작업과 무관한 ‘필기시험’을 보게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6월초부터 모두 3차례 치러진 시험은 “관악학생생활관을 영어 또는 한문으로 쓰시오”라거나, “기숙사 919동의 준공연도는?”, “우리 조직이 처음 개관한 연도는?” 등과 같이 청소 업무를 진행하는 것과 직접 연관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시험 점수는 다음 회의 시간에 모든 노동자들 앞에서 공개됐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한 청소노동자는 “예고 없이 갑자기 시험을 봤는데, 동료들 앞에서 점수가 공개돼 창피를 당했다. 울음이 나왔다. 갑작스럽게 당혹스럽고 자괴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매주 수요일 근무시간에 열리는 회의에 참석 ‘드레스코드’를 공지한 ㄴ안전관리팀장. 민주노총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제공
숨진 ㄱ씨가 가장 힘들다고 동료들에게 토로했던 제초작업도 ㄴ팀장이 새로 부임한 뒤 시작됐다. 지난달 중순 회의에서 ㄱ씨가 “제초작업까지 하는 건 너무 힘들다”고 항의하자, ㄴ팀장은 주말 근무 시간외수당을 깎아 제초작업을 외주로 주겠다는 취지로 답변했다고 청소노동자들이 전했다. ㄱ씨는 ㄴ팀장에게 “임금 문제는 노조와 합의해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식으로 임금을 깎는다는 말은 협박으로 들린다”고 항의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ㄴ팀장이 부임한 뒤 행정실장, 부장, 팀장 등 3~4명이 청소 상태를 검사하는 ‘검열’이 시작돼, ㄱ씨를 비롯한 청소노동자들이 큰 스트레스와 압박을 받았다고 노조는 밝혔다.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서울본부 박문순 법규정책국장은 “청소노동자들의 진술서를 보니, 검열이 시작된 뒤 노동자들의 스트레스가 심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닦아도 티가 안 나지만 검열을 앞두고는 창틈, 샤워실 곰팡이 청소를 모두 하느라 힘들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ㄱ씨의 남편은 “아내는 한 일간지에서 오랜 시간 기자생활을 하고, 함께 15년 전 세네갈에서 엔지오(NGO) 활동을 하다 2017년 귀국했다. 막막했지만 서울대에서 근무할 수 있어 너무 기뻤다”고 ㄱ씨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서울대에 “노동자는 적이 아니다. 강압적인 태도로 노동자들을 대우해 주시지 않기를 바란다. 일을 하러 왔지 죽으러 출근 하지 않았다. 서울대는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배려해 꼭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노조는 ㄱ씨의 산재 신청을 위한 서울대의 협조를 요청했다. 박문순 국장은 “ㄱ씨는 급성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는데, 가장 주요 원인이 스트레스다. 최근 급격한 직업 환경이 변화했다. 최근 법원 판례 비춰봤을 때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산재로 인정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객관적인 조사를 위해 학교와 노조의 공동 조사단 구성을 제안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대 관계자는 “필기시험은 직무교육 차원에서 시행했지만, 문제가 있다고 보이므로 폐지할 예정이다. ㄴ팀장의 발언 관련해서는 사실관계를 파악한 뒤 조처하겠다”고 밝혔다. 또 “노조와 ㄱ씨의 가족이 산재 신청을 하면, 학교는 산재 조사에 성실히 협조할 것이다. 청소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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