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서울 연희동 김용애의 자택에서 이석영의 세 손녀와 가족이 모여 찍은 기념사진. 대만에 살던 이우숙이 한국에 사는 언니 이숙온의 집을 찾아와 세 자매가 40년 만에 재회했다. 이 사진은 이우숙의 아들이 보관하고 있었다. 김용애씨 제공
후손이 끊겼다고 잘못 알려진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1855~1934)의 직계 후손이 여러 명 생존한다는 사실이 대만 정부가 작성하고 발급한 가족관계 문서로도 확인됐다. 이석영의 아들이자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이규준(1896~1928)의 손녀인 김용애씨의 가족은 최근 이규준의 3녀로 대만에서 살았던 이우숙의 호적등본에서 그 부친 이규준의 이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앞서 이달 초
<한겨레21>(제1373호)이 최초로 보도한 김용애씨 일가의 사연이 대만의 공문서로 뒷받침된 것이다.
이석영은 17세기 조선의 문신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이후 내내 정승과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이자 걸출한 독립운동가 집안인 ‘경주 이씨 6형제(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중 둘째다. 이들은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무장투쟁의 요람이던 신흥무관학교(1911~1920)를 세우고 운영했다. 신흥무관학교 교주(이사장)을 역임한 이석영은 규준·규서 두 아들을, 규준은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시기에 온숙·숙온·우숙 세 딸을 뒀다. 그러나 1928년 서른넷 젊은 나이에 규준이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았다. 이후 그의 아내 한평우는 생계를 위해 세 딸을 남겨둔 채 재가했고, 10대 어린 나이의 자매들도 머지않아 뿔뿔이 헤어진 채 힘겹게 살아내야 했다. 이석영은 1934년 중국 상하이에서 79살에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한겨레21>이 열람한 이규준의 셋째딸 우숙의 호적 등본에는 남편인 ‘호장(호주) 장○○’의 이름 옆 칸에 ‘처(妻) 장이우숙, (처의) 부 이규준, 모 한씨(한평우)’의 성명이 정서돼 있다. 대만 핑둥현 핑둥시 호정(戶政)사무소가 발급한 이 공문서에는 ‘본부 등본과 호적등기 호적 기재가 다르지 않음’이란 공증 문구와 직인이 찍혔다. 대만에서는 여성이 결혼할 경우 본디 자기 성씨에 남편의 성씨를 덧붙이는 복성주의(複姓主義)를 채택하고 있다. 호적등본 확인은 대만 한인회장을 지낸 임병옥 재향군인회 대만지회장이 역할을 했다.
대만 핑둥시 호정(戶政)사무소가 발급한 이우숙의 호적등본에 ‘부 이규준, 모 한씨’라는 이름이 또박또박 쓰여 있다. 이우숙이 이규준의 3녀(셋째 딸)라는 사실도 확인된다. 김용애씨 제공
앞서 한국에 있는 규준의 첫째, 둘째딸 온숙과 숙온의 경우 사진과 물증, 관련자 증언이 나왔지만 호적등본에는 친부 이름이 이규준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기록돼 있었다. 정부가 이석영, 이규준이 ‘절손(자손이 끊김)’이라고 밝혀온 이유다. 하지만 대만 호적등본이 확인되면서 이석영과 이규준의 후손이 생존한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현재 이규준의 딸들인 온숙과 숙온의 딸 최광희씨와 김용애씨 등이 한국에 생존해 있다. 국가보훈처는 “보훈처에서 확인한 공적 자료와 사진
등 증거자료뿐만 아니라 외국 정부에서 발급(발견)한 문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유족 여부를 판단”한다고 밝혔다. 조일준 <한겨레21> 기자 iljun@hani.co.kr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한겨레21> 제1377호 ‘이석영 후손 증명 문서 대만에서 나왔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