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바이든 대통령 지시로 설립된 ‘미군 내 성폭력 관련 독립검토위원회(IRC)’ 구성원들. 누리집 갈무리
공군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군내 성폭력 근절을 비롯한 군 인권과 병영문화 전반을 개선하기 위해 발족한 민관군 합동위원회 위원들이 국방부의 낮은 개혁 의지를 질타하며 연이어 사의를 밝혀 파행을 빚고 있다. 아직 위원회 활동 기간이 끝나지 않았지만 미국이 지난해 발생한 군 성폭력 사건에 독립위원회를 꾸려 성과를 낸 것과 비교되는 모양새다. 미국 독립위원회는 최근 80여가지 권고안을 내놓아 국방부의 변화를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2월 조 바이든 대통령 지시로 설립된 ‘미군 내 성폭력 관련 독립검토위원회(IRC)’는 90일의 조사 기간을 거쳐 지난달 82개 권고사항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지난해 4월 텍사스주 육군기지에서 복무하던 여군 바네사 기옌이 실종된 뒤 숨진 채 발견됐는데, 그가 실종 전 성추행 의혹을 호소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미국 사회의 공분을 일으켰다. 이후 다른 피해 여군들의 증언이 쏟아졌고, 독립위원회가 꾸려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당선 뒤 민간 전문가와 시민단체 활동가 다수와 군 출신 인력 및 법무부 소속 심의관 등을 포함한 12명의 독립위원회를 조직해 지난 3월부터 군 성폭력 근절 방안 마련에 나섰다. 성추행 피해를 입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공군 이 중사 사건이 발생한 뒤인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 지시로 만들어진 민관군 합동위원회도 미국의 독립위원회와 역할이나 기능이 유사하다.
그러나 미국 독립위원회 조사가 우리와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위원들이 직접 군내 성폭력 피해를 입은 생존자들을 대면해 이야기를 듣고, 이를 토대로 피해자의 목소리가 담긴 개선방안을 내놨다는 것이다. 26일 독립위원회가 낸 보고서를 보면, 위원회는 대면 인터뷰와 전화, 화상 토론, 서면 진술 등을 통해 군 성폭력 피해 생존자 200명 이상의 경험을 듣고 237건의 익명 증언서를 추가로 제출받았다. 이들은 코로나19 상황에서도 5개주 6개 군 시설을 직접 방문해 성폭력 생존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군에서 성폭력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된 하급 사병들만 171명가량을 만났다고 한다. 군 성범죄 사건의 책임자 격인 각 군 지휘관과 부사관은 물론 현역 및 전역 장병과 참전용사, 군내 피해자 지원 기관 직원들까지 포함해 이들이 만난 군 관계자는 600여명이 넘는다.
이는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는커녕 국방부에 자료 요청을 하거나 제한적으로 군 수뇌부를 만나야 했던 국내 합동위의 활동 반경과는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지난 25일 강태경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과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 등 6명은 위원직 사의 의사를 밝히고 “위원들은 피해자가 사망에 이른 배경을 파악해 정책적 보완지점을 찾아내려고 했지만 국방부 장관과 출석을 요구받은 해군참모총장, 피해자 소속 부대장, 수사책임자 등은 별다른 설명도 없이 출석하지 않았다”며 “피해자가 세상을 떠났음에도 여전히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국방부 태도를 접해 합동위를 통한 개혁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고 밝힌 바 있다. 성폭력 예방 및 피해자 보호 개선을 위해 모인 2분과의 경우 군 양성평등센터장과 성고충상담관, 초임 여군 부사관 간담회를 통해 의견을 청취한 바 있다. 그러나 합동위원으로 활동했던 한 위원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미국의 경우, 위원회를 통해 군 내 성폭력 사건 전수조사까지 할 수 있었지만 합동위의 조사 범위는 매우 한정됐다. 군인들을 대면할 기회 자체가 적었고, 피해 경험이 있는 군인들을 만나는 것도 매우 어려웠다”고 말했다.
‘독립적 특별검사’ 권고안, 군 최고수뇌부 수용
미국의 경우 방대한 조사 끝에 만들어진 독립위원회의 권고사항을 국방부가 수용해 의회와 논의하는 구조가 마련되기도 했다. 독립위원회는 △사법적 책임 △예방 △근무환경 및 군 문화 △피해자 보호 및 지원 등 네 분야로 나눠 각 주제별로 상세한 권고사항을 달았다.
대표적으로 군내 성폭력 사건이나 ‘특별 피해자’ 관련 대상 범죄는 지휘관이 아닌 독립적인 특별검사가 맡도록 하는 것이다. 군에서 발생한 각종 성범죄뿐 아니라 스토킹과 가정폭력, 디지털 성착취물 관련 범죄도 지휘관이 아닌 독립된 특별검사가 기소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군 지휘관들은 군내 성범죄 사건 처리를 자신들의 지휘권 밖으로 빼내 군검찰에 맡기는 방안에 오랫동안 저항해왔다고 한다.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은 군 성폭력 사건에 대한 기소 권한을 지휘관으로부터 떼어내는 내용 등이 담긴 권고안을 받아들였고, 현재 의회에서 최종 논의가 진행중이다. 백악관도 지난달 2일 성명을 내 “독립위원회 핵심 권고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국방장관의) 결정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밝혔다.
여기서 ‘특별 피해자’ 사건은 범죄 종류와 상관없이 아동과 노인, 장애인, 배우자 등이 피해자가 되거나 피해자의 성별, 인종, 성적 취향, 국가 등에 기반을 둔 증오 범죄 등을 의미한다. 독립위원회는 이런 종류의 사건 역시 특별검사가 맡도록 권고했다. 이런 방식으로 피해자 특성을 구체화할 경우, 개별 피해자에게 맞춤형으로 형사사법절차를 진행하고 피해자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들을 수 있는 효과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 등 군내 성소수자의 인권 보호를 위한 권고안을 마련한 데도 의미가 있다. 독립위원회는 “성희롱과 성폭력 피해자들은 성별과 성 정체성, 인종 등에 따라 피해를 경험할 확률이 달라진다”며 특히 동성애자와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군인의 경우 성폭력은 종종 괴롭힘과 신고식에 수반돼 발생한다”고 짚었다. 보고서는 “위원회가 만난 한 생존자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신경 쓸 동료들에게 낙인 찍히는 것이 두려워 성폭행 피해를 신고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설명하기도 했다”고도 밝혔다. 이에 위원회는 성소수자와 소수인종, 종교적 소수자 및 성추행 피해를 입은 남성 병사 등 기존 성폭력 지원 프로그램에서 소외된 이들의 요구를 수용할 프로그램 개발 및 군내 성폭력담당대응관의 역량 강화 등을 군에 주문했다.
한편, 지난 2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 제1소위원회는 군내 성범죄와 군 사망사건, 입대 전 사건 등에 한해 민간이 수사와 재판을 담당하도록 군사법원법 개정안에 합의했다. 그러나 평시 군사법원 폐지 등 높은 수준의 개혁안을 요구했던 군인권단체와 시민단체들은 ‘반쪽짜리 합의안’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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