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회민주당 총리 후보인 올라프 숄츠(가운데)가 지난 3일 베를린 한 공원에서 시민들에게 정책을 설명한 뒤 토론하고 있다.
오는 26일 독일 총선이 보름 남짓 남은 가운데 판세가 달라졌다.
독일 여론조사기관 알렌스바흐에 따르면, 8일 현재 사회민주당(사민당)이 지지율 27%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소속된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을 2%포인트 앞섰다. 1월만 해도 기민련이 지지율 36%로 부동의 1위였고 사민당은 그 절반도 되지 않았던 것(16%)을 보면 놀라운 역전극이다. 이대로라면 사민당 후보 올라프 숄츠(63)가 독일의 새 총리가 된다. 2005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조기총선 패배로 메르켈에게 밀려난 지 16년 만에 사민당은 정권을 되찾을 수 있을까?
기민련 지지율을 처음 추월했던 게 지난 2일. 이튿날, 흥분과 기대가 넘쳐나는 사민당 토론회를 찾았다. 이날 베를린 한 공원 야외 술집에는 사민당의 붉은색 펼침막들이 걸렸다. 사민당은 시민들을 초대해 주요직 후보들과 대화하는 작은 규모의 시민 토론회를 거의 매일같이 개최해왔다. 저녁 7시30분 숄츠는 같은 당의 프란치스카 기파이(43) 베를린 시장 후보, 아나마리아 트러스네아(27) 연방의회 의원 후보, 알렉산더 프라이어빈터베르프(34) 베를린연방주 의회 후보 등과 함께 연단에 섰다.
‘가능성 없다’ 평가 뒤집은 숄츠
함부르크시장 출신으로 메르켈 정부 재무장관을 맡는 숄츠가 지난 5월 사민당 총리 후보로 선출됐을 때만 해도 독일 신문들은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고 보도했다. 그 뒤 아날레나 베어보크(40) 녹색당 후보가 표절 시비에 휘말리고, 아르민 라셰트(60) 기민련 후보가 수해 지역을 찾아 크게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며 추락을 거듭했다. 그사이 숄츠는 재무장관으로서 빠르게 수해지원금을 집행하며 상승세를 탔다. 메르켈 내각의 일원인데다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없는 점까지 메르켈과 닮은꼴 정치인으로 부각되면서 날개를 달았다.
사민당의 선전은 ‘숄츠 효과’뿐 아니라 일찍부터 선거전에 돌입해 당내 단결과 혁신정책을 구체화해 온 덕이기도 하다. 다른 두 후보의 당내 지지율은 절반 안팎이지만 숄츠는 당원 85% 이상이 지지한다. 또 독일 방송 <아에르데>(ARD) 설문조사를 보면, 사민당은 사회정책에서 유권자들에게 특히 좋은 점수를 받았다. 최저임금 인상, 노령연금의 장기 보장, 가족·보육정책 순으로 지지를 얻고 있다.
환경 문제에 대해선 어떨까. 이날 숄츠의 발언 도중, 기후정의를 위해 무기한 단식투쟁 중이라는 단체의 청년들이 갑자기 연단 앞으로 나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숄츠지만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 사민당이 무엇을 했느냐”는 청년들의 질문에 어조가 빨라졌다. “여기 선거 현수막에도 적혀 있습니다. 사민당은 즉시 원자력과 화력발전을 중단할 것을 주장해왔습니다.”
짧은 대치 뒤, 긴 정치토론으로 이어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왔다고 밝힌 한 시민은 “아프간에 가족들이 남아 있다. 독일 정부는 탈레반과 어떤 관계를 맺을 계획이냐”고 물었다. 숄츠는 “미국이 철군을 결정했을 때 유럽연합은 좀 더 완만한 철수를 주장했는데 관철시키지 못했다. 독일이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며 한계를 인정했다.
사민당의 시민토론회에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질문하고 답을 듣고 있다.
숄츠의 유세장에서 특히 눈길을 끌었던 건 코로나19에 대한 대화였다. 독일에서 9월1일까지 예방접종을 마친 비율은 61.1%다. 숄츠는 “나를 포함해 앞서 접종을 마친 5천만명을 실험용 토끼였다고 생각하고 이제 예방접종을 받으라”고 독려했다. 지적인 대화를 구사하면서도 독특한 유머감각을 가졌다는 평을 듣는 숄츠의 화법을 보여주는 장면이지만, 접종자를 실험 대상에 비유한 발언은 다음날 공격 대상이 됐다. 물론, 코로나19에 대한 유권자 관심은 사민당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같은 날 튀링겐주 에르푸르트에서 유세하던 라셰트의 연단에 갑자기 코로나19 방역에 반대하는 단체 활동가가 들이닥쳐 “아이들에게 예방접종을 강제해선 안 된다”고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 라셰트는 “총리실 전화번호를 가르쳐 드리겠다”는 농담으로 상황을 진정시켜 화제가 됐다. 라셰트와 함께 녹색당 베어보크 후보도 독일 전역에서 수천명이 모인 군중집회를 통해 차분히 정책을 설명하는 유세를 이어가고 있다. 청중들은 맥주나 와인잔을 앞에 두고 후보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청년 참여 많은 정치는 퇴행 안해
아울러 사민당 정치인들이 집중한 또 다른 주제는 여성과 청년이다. 특이한 점은 이날 연단에 올랐던 사민당 정치인 대부분이 10대에 정치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숄츠는 17살에 사민당에 가입했다. 13살에 루마니아에서 독일로 이민 온 트러스네아는 19살, 프라이어빈터베르프는 15살에 입당했다. 연단 뒤편에서 만난 트러스네아는 이민자로서 학교와 사회에서 소외당했던 경험을 해결하고 싶어서 정치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독일 연방하원 의원 중 57명, 전체 의원의 8%가 이민자 집안 출신이다. 그는 또 여성 의원 비율을 현재 36.3%에서 절반까지 늘리겠다고 약속한 상태다.
프라이어빈터베르프는 지금은 극우당 지지자가 된 의붓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한 경험, 학교가 문 닫는 것에 맞서 싸운 경험을 하면서 정치를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동성애자이면서 교사인 그는 <한겨레>와 만나 “동성애자에게도 안전한 사회, 가난한 사람에게도 주거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정치를 한다”고 했다. 프라이어빈터베르프는 2016년 선거에서 데이트앱에 선거 포스터를 내걸고, 유권자들에게 구애하면서 화제가 됐다. 독일 사회에서도 젊은 세대의 정치 참여는 큰 과제지만, 여성·청년·이민자에게 더 많은 기회와 의석을 내주는 정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숄츠는 이날 토론회에서 “16살부터 참정권을 허용해 더 많은 청소년이 정당에 가입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청년이 많은 당은 퇴행하기 어렵다. 이날 유권자 니클라스(24)는 “4년 전 사민당에 투표했으나 보수당과 대연정에 매우 실망했다”며 “이번에 집권하면 무기력한 대연정을 반복하지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베를린/글·사진 남은주 통신원 nameunjoo1@gmail.com, 이진 <힙 베를린, 갈등의 역설> 저자
남은주 통신원은 <한겨레> 기자로 일하다 베를린에 살면서 기고, 번역활동을 하고 있다, 이진 독일 정치+문화연구소 소장은 정치철학자로 <힙 베를린, 갈등의 역설>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