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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천만 가지 얼굴요? 어떤 역할 맡아도 진짜 내 모습은 감출 수 없어요

등록 2021-10-03 08:43수정 2021-10-03 09:19

[한겨레S] 유선애의 배우는 사람 : 배우 예수정
“극 속 인물, 지금 살아 있게” 기도하며 거짓 없이 연기
40년 연기 인생 “이쯤 되니 ‘수정아, 잘했다’ 싶네요”

사진가 윤송이
사진가 윤송이

배우 예수정은 바깥의 환한 가을볕을 자기 쪽으로 다 끌어모은 사람처럼, 해사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영화와 드라마를 동시에 촬영하고 있다는 스케줄이 믿기지 않게 그에게서는 명랑과 생기가 흘렀다. 대화가 시작되고 두세 가지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을까, 화장을 조금도 하지 않은 맑은 얼굴이 천천히, 그만의 리듬을 타기 시작하더니 이지러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벌> <허스토리> <69세>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마인> 등에서 만났던 자애롭고 온화한 얼굴, 결연하고 선명한 얼굴이 대화 도중 포개지고 덧입혀졌다. 느리게 말을 고르다가도 불현듯 눈을 형형히 반짝이며 적확한 단어를 찾아내 선언하듯 내뱉기도 했다. 자기 삶의 확고한 주인으로 살고자 부단히 노력해온, 나이가 들어서도 배우고 성장하기를 멈추지 않는 예술가의 말을 서둘러 주워담았다.

배우 예수정 _ 고려대 독문과 재학 당시 독일문화원 소속 극단 ‘프라이에뷔네’ 단원으로 배우를 시작했다. 1979년 연극 <고독이란 이름의 여인>으로 데뷔한 뒤 <밤으로의 긴 여로> <그린 벤치> <바다와 양산> 등 예술성과 실험성을 겸비한 작품을 소화했다. 2000년 이후부터 영화 <부산행> <신과 함께: 죄와 벌> <허스토리> <69세> 등에 출연, 2018년 <행복의 나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사진가 윤송이
사진가 윤송이

쉼 없이 ‘새싹’ 틔워온 40년 연기 인생

―내내 촬영 중이신 걸로 들었습니다. 한데 피로가 조금도 느껴지지가 않아요. 너무 해사하게 등장하셔서요.

“오늘 쉬는 날이니까 여기서 놀아야겠다 생각하며 왔어요. (웃음) 이 직업이 재미있잖아요. 밤샘 촬영만 아니면 좋아요. 근데 이 질문들 직접 만들었어요? 좋았어요.”

―준비하며 마음이 무거웠어요. 얼마 살아 보지도 않은 사람이 발을 헛디뎌 무례를 저지를까 싶어서요.

“노노노, 그런 거 없어요. 아니, 그럴수록 좋죠. 무례했으면 좋겠어요. 버릇없는 후배들 좋아해요. 오늘 인터뷰한다고 준비해주시겠다는 분장과 의상을 사양한 이유도 너무 예의 바를까 봐예요. 그렇게 되면 시작부터 내가 입이 안 떨어질 거 같아서.”

―허락하셨으니 예절은 내려놓고. (웃음) 독일에서 머물던 시간을 제외하면 지난 40년간 단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매년 작품에 임했습니다. 배우로 살아가야만 하는, 혹은 연기를 하지 않는 시간들에 대해서는 어려움을 느끼는 유형의 배우일까 짐작했어요.

“그런 건 아니에요. 의외로 잘 살아요. 한데 연기를 하면 내게 좋은 것들이 있죠. 연기를 안 할 때는 세상과 사람들을 통해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이 내 안에서 산만하게 떠돌아다녀요. 그러다 연기 작업을 하게 되면 그 산만하던 사고들이 작품과 인물을 통해 어느 한 방향으로 모이고 뻗어나감을 느껴요. 연기가 아니라면 내 안에서 분뇨가 돼 사라질 법한 것들이 밖으로 나와 새싹을 틔우는 거죠. 그리고 내 안에 무언가 쌓일 시간도 필요하다는 걸 아니까, 연기하지 않는 시간들을 못 견뎌하지 않고요.”

―어쩌면 휴식의 개념이 조금 다른 것일까요? 예수정 배우가 생각하는 쉼은 단지 작품 밖에만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의 문제에서 한 발 떨어져서 새롭게 호흡하고, 새 힘을 얻는 것을 두고 우리가 휴식이라 부르죠? 그런 의미에서라면 공연 연습은 나에게 기막히게 좋은 휴식이에요. 왜 여행 가면 발이 부르트도록, 혓바늘이 돋도록 몸을 쓰는데도, 기분이 좋잖아요. 피곤해 죽겠어가 아니라! 작품과 작가, 배우, 스태프들과 만나고 부딪히면서 내 안에 있던 것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변환하고, 소멸하는 과정들이 큰 기쁨을 줘요.”

―연습 가기 싫던 날은 없었어요?

“있죠. 피곤하고 귀찮아서는 아니고요, 숙제를 안 했을 때. 어제까지 더듬었던 부분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게 없을 때 도망치고 싶어요. 한데 이 또한 변해요. 나만 믿고 작업할 때는 땡땡이치고 싶었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나만 믿지 않고 동료들을 믿어요. 그러니 어느 때에는 ‘내가 가진 게 없으니까 여러분이 나를 좀 매질해봐. 그러면 뭐가 나올 수도 있어’ 하는 마음으로 뻔뻔스럽게. (웃음)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함께하는 협업자들에 대한 기대로 현장에 가죠.”

존재감 희미한 아이를 깨운 종소리

―어린 시절에는 존재감조차 희미한 아이였다고요?

“하도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 엄마가 ‘너 그러다 입에 곰팡이 슨다’ 할 정도로 조용한 아이였어요.”

―말수는 없지만 그 안의 우주에서는 뭔가가 분주히 일어났나 봅니다. 배우였던 어머니를 통해 겪었던 체험들도 연기를 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 같고요. (그의 어머니는 국립극단 배우이자,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김 회장(배우 최불암) 어머니 역할을 했던 원로 배우 고 정애란씨다.)

“분명히 있을 거예요. 지금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명동예술극장은 공연 전 종소리를 크게 울려요. 어린 시절 내내 엄마를 따라다니며 그 소리를 들었죠. 극이 오르기 전 사위는 깜깜하고 진공 상태에 가까운 정적이 일어요. 그러다 문득 종이 ‘웅’ 하고 울려요. 모르긴 해도 그 소리에 자고 있던 감각과 에너지가 일제히 불러일으켜지지 않았나 싶어요. 그때의 시공간 체험이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걸 보면 큰 영향을 미친 거죠. 무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입을 헤 벌린 채 그대로 당한 거예요. 다섯살짜리 아이가 무방비 상태로 겪었던 총체적인 예술적 체험이 알게 모르게 배우로 살아가는 계기가 된 거죠.”

―배우가 되는 첫 시도가 어렵지는 않았나 봅니다.

“망설이다가 각오를 하고 결단을 내렸다면 시작이 어려웠을 거예요. 대학에 입학하고 6개월 정도 말을 거의 안 하고 산 적이 있어요. 말에 대한 책임이 무거워서요. 그때 극장에서 영화 <대부>를 봤어요. 감흥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영화에서 마론 브란도(말런 브랜도)가 쓰러지는데, 내가 벌떡 일어날 것 같더라고요. 당시 극장 위에 있던 독일문화원에 곧장 달려가 ‘나 이것 좀 해보면 안 돼요?’ 했어요. 별안간의 시작이었지만 좋은 선배들이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연극이 예술인 걸 몰랐어요. 왜냐하면 배우 생활을 하는 엄마 집에서 자랐으니까 우리 집에는 항상 문정숙, 김지미, 윤인자, 조미령 선생님 등 매력 있는 배우들이 찾아오고 또 즐겁게 지내셨단 말이에요. 그러니 배우에 대한 호기심은 없었죠. 배우보다는 연극에 대한 관심이 먼저였어요. 그러다 연출가 장두이, 그리고 고금석 선배님, 유덕형 선생님 등을 통해 연극이 종합예술이라는 걸 체험하게 된 거예요.”

사진가 윤송이
사진가 윤송이

―몇몇 인터뷰에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바람으로 연기를 시작했다고도 했습니다. 그 바람이 연기로 이어진 경로가 궁금합니다. 굳이 연기가 아니어도 사회를 변화시킬 다른 선택지들이 있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조금 부끄럽죠. ‘수정아, 네 눈앞의 머리카락이나 잘 주워. 무슨 사회개혁이야’ 싶지만 젊을 때는 내 정신의 많은 부분이 거기에 가 있었어요. 근데 그건 비단 나만이 그랬던 건 아니에요. 당시 젊은 세대가 특별해서도 아니고요. 시대 기류가, 시대정신이 그랬어요. 제가 73학번인데 당시에 도서나 음반 등 금지당하는 게 많았어요. 저한테는 그래 봤자 브레히트 책 같은 거죠. 필요 이상의 억압 속에서 숨이 트이던 경험들이 나를 바꾼 거예요. 막스 프리슈의 <만리장성>이라는 작품을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기로 한 적이 있어요. 한데 공연 며칠 남기고 검열단에 의해서 공연이 금지된 거예요. 그때 선배님들이 대본을 고쳐서 하겠다고 하고 검열 대본을 만들어 제출했어요. 그러고는 단 하루, 원래 대본대로 공연을 올렸어요. 그 공연을 하면서 동료들과 삶의 희열을 나누는 경험을 처음 했어요. 브레히트의 ‘극장은 시민을 계몽하는 공간이다’라는 말이 불현듯 내 안에 들어와 박혔고요. ‘그래, 이거야! 나 여기서 일할 거야’ 한 거죠.”

―명분을 얻은 것이지요?

“그렇죠. 지금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단어인 ‘소통’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대였어요. 사전에만 있었겠지. 자유, 평등, 인권이라는 말에 다가가는 건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을 보고 자란 세대예요. 선각적 지식인이라 여겼던 선배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다시 만났을 때는 신체 한 부분을 쓰지 못하거나, 혹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됐으니까. 인류의 긴 역사를 생각하면 이게 불과 몇년 안 된 일이잖아요. 누군가 피 흘리며 얻어낸 자유와 인권이 이제는 피부처럼 우리에게 가까이 붙어 있지만 소중히 다루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떨어져나갈 수 있다고 봐요.”

―당시 계몽의 대상은 관객뿐만 아니라 배우 자신 역시 포함되었겠지요?

“그럼요. 가장 먼저 계몽되는 사람이 작업자니까요. 시어머니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누가 돈을 주니, 명예를 주니, 뭐 하려고 그렇게 하냐’는 말과 시선을 꾸준히 받으면서도 연기를 놓지 않은 건 그래서일 거예요. 내가 달라지니까.”

―연기를 하며 크게 깨어난 순간, 눈이 확 떠진 순간이 있다면 언제였나요?

“깨어났다기보다 유독 크게 자책하고 스스로를 힘들게 한 작품들이 있어요. 자양강장제 열 병을 한번에 마신 것처럼 몸이 부들부들 떨리던 작품은 아리엘 도르프만의 <과부들>(1970년대 칠레의 피노체트 군사정권 시대를 배경으로 실종과 의문사를 다룬 저항극)이에요. 정작 나는 이 작품 속 인물(소피아 역, 현실과 타협한 마을의 여인들을 일깨우는 이)처럼 살지 못했고, 못하는데…. 머리가 많이 숙여지는 작품이었어요. 사회적 억압을 자신의 몸으로 견뎌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극과 현실이 만들어낸 파장들이 나를 막 두드렸어요.”

숨길 수 없는 배우의 얼굴

―평소 자신을 두고 ‘테크닉이 부족한 배우’라고 했습니다. 한데 테크닉이 부족한 배우야말로 가장 어려운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작품마다 터득한 것들을 애써 떼어 놓거나 잊어야 하니까요.

“애써 떼어 놓거나 잊어야 할 것도 없어요. 자신의 연기를 열심히 모니터 한 뒤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추리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며 풍부해지는 것이 테크닉일 텐데요, 저는 그러질 못해요. 그보다는 작가의 뇌를 탐색하듯 인물과 행동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회의 모습을 더듬는 걸 좋아해요. 어떻게 하면 이 허구의 인물을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 모퉁이, 아스팔트 틈에 살짝 가져다 놓을 수 있을까에 골몰하기 때문에 정작 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연습보다 묵독하는 시간이 길어요. 테크닉을 생각할 여력이 없어요. 테크닉은 그냥 면피 정도지. (웃음) 그래도 연기하며 거짓말은 안 한 거 같아요. 인물 행위의 동기에 대해 그저 충실하게 찾아갔어요. 그 준비 과정이 끝나면 연기하기 직전 ‘지금 이 순간, 살아 있게 하소서’ 하고 바랄 뿐이죠.”

―우리가 일상에서는 타인의 내면과 이면을 그렇게까지 파헤쳐보는 수고를 들이지는 않잖아요. 허구의 인물이지만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삶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다.

“그럼요. 굉장히 고맙죠. 맡은 인물 단 한명이 아니라, 그 인물과 얽혀 있는 제2, 제3의 인물들과의 관계까지 바라봐야 하는 일이니까요. 인물의 사고와 정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는 일이기 때문에 실제 삶의 여러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도움을 받아요. 특히나 저처럼 분주하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겐 더욱이.”

―연기 덕분에 현실에서 새롭게 보이고 느껴지는 것도 있지요?

“몰랐던 삶의 여러 부분을 봐요. 요즘은 사람이 보여요. 예를 들면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이 그저 장하다고 할 건 건강한 몸 하나 지닌 이가 매사에 자신만만하고, 기쁨의 표정을 자주 보이며, 주변에 너그러운 태도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도 신이 나요. 반면 여러모로 가진 게 많은데도 어떤 비루함을 버리지 못해서 초조해 보이는 사람들을 볼 때면 ‘아, 참 알 수 없는 게 삶이라더니…’ 그러니까 삶이 신비한가봐요.”

사진가 윤송이
사진가 윤송이

―젊은 날과 비교할 때 배우로 살아가는 동력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나요?

“완전히 변한 건 아니지만 높낮이는 달라졌죠. 우리 사회에서 이해할 수 없던 부분들, 획일성과 불공정, 문화 없음으로 인한 답답함이 동력이 됐었다면 이제 그 시절은 지난 것 같고요.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장년으로 살아가며 바깥의 것뿐만 아니라 내 안의 것들이 보여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 속에 분명히 있는 사랑, 순수, 용서 같은 것들이 나를 움직이게 하죠. 가까운 사람이 베풀어준 마음을 받고 뒤돌아서 서서 크게 울었던 시간처럼, 일상에서 만나는 감동들도 동력이 되고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른 인간을 살리는 경이를 뉴스로 전해 들을 때 불현듯 크게 떨리고요.”

―배우가 지닌 얼굴 근육과 눈빛, 주름 또한 연기의 일부일 텐데요. ‘나’라는 재료를 어떻게 사용하고자 하나요?

“지인들이 충고를 해요. 천만 가지 얼굴을 지닌 배우가 될 수 있도록 욕심을 좀 내보라고 하는데, 그런 욕심이 없기도 하고 낼 수도 없어요. 내 주제가 그렇게 못 되고요. 아마 그런 배우는 타고나길 대단한 분들일 거예요. 그 외 대부분의 배우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속일 수가 없어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어느 순간 자석이 붙는 것처럼 실제의 내 모습이 역할에 철썩 붙으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 안 할 수가 없죠. 최소한 내 손으로 선별하며 살고 싶어요. 설사 세상의 질타를 받는 일을 하게 되더라도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식으로 변명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 ‘내가 그렇게 살기로 정한 거예요’ ‘내가 이러한 이유로 선택한 거예요’라고 답할 수 있길 바래요. 어떤 것을 선택하고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해 명료하고 싶고, 동시에 개인의 선택을 사회가 강요하지 않아야 할 테고요. 일단 나부터 그렇게 살아보고자 해요.”

―이제 마무리할까요. 지나온 시간 속에서 어떤 모습을 칭찬해주고 싶나요?

“배우로 살며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소중히 대했다는 건 칭찬해주고 싶어요. 내가 늦으면 그 사람들 시간을 도둑질하는 거잖아요. 다른 사람의 시간을 훔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배우 바깥에서는 삶을 소박하게 꾸리고 일상에 대한 존중을 가지며 살고자 했어요. 의식적으로 ‘존중심을 갖자’ 했던 것은 아니고요. 보잘것없는 일상 속 매일 반복되는 지난하고 귀찮은 일들에 대해 크게 불평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대해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수정아, 괜찮았어’ 하는 생각이… 이쯤 되니 드네요? (웃음)”

유선애 _ 1990년대에 태어난 멋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묶은 인터뷰집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2021)을 펴냈다. 매 순간 새롭게 배우고 깨치는 배우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 많다. 맡은 배역을 깊이 탐구하고 탐험해온 중견 여성 배우들에게 ‘배우는 삶’에 대해 묻고, 듣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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