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n번방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던 ‘추적단 불꽃’ 이 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메일함에 꽂히는 편지는 감촉을 느낄 순 없다. 하지만 그들이 보내온 편지의 온도는 불꽃처럼 뜨겁다.
텔레그램 엔(n)번방을 세상에 처음 알린 ‘추적단 불꽃’(불꽃)은 지난달 25일부터 뉴스레터 서비스인 ‘불꽃레터’를 시작했다. 보내온 편지에는 피해자들을 지지하고 연대하며 나아가겠다는 잔잔한 열기부터,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뜨거운 분노들이 모두 담겼다. 지난 3일, 서울 영등포구 한 카페에서 추적단 불꽃의 활동가 ‘불’과 ‘단’ 두 사람을 만났다.
불꽃은 디지털 성범죄를 심층 취재하는 익명의 기자단이자 활동가들이다. 언론인과 활동가, 둘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가까우냐고 물으니 두 사람은 “사람들을 만나면 주로 활동가라고 소개한다”고 말했다.
대학생 신분이던 2019년 엔번방을 목격한 때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행보를 돌아보면 그럴 만하다. 목격하고, 신고하고, 지원하고, 보도한다. 피해 제보자를 지원 단체나 경찰에 연결하는 일은 불꽃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다. 기성 언론과 협업해 디지털 성범죄 기사를 내보내고, 지난 5월엔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해 자체적으로 르포 매거진 <추적단 불꽃―우리, 다음>을 발간하기도 했다. 국제앰네스티 등 인권 단체와 협업하고, 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대응 태스크포스(TF)팀에도 참여했다.
한명의 피해라도 더 줄일 수 있다면
쉼 없이 달려온 2년, 그사이 엔번방 가해자들은 검거됐다. 지난 11일에는 엔번방 일당 가운데 마지막으로, 운영자 문형욱(갓갓)에게 징역 34년형이 확정됐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또다른 디지털 성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불꽃 또한 거대한 디지털 성범죄의 세계에 지치지 않고 맞선다.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화력은 무엇일까.
“가해자들을 향한 분노가 원동력이었어요. 너무 우리 일처럼 화가 나고, 그러다 보니까 그냥 막 뛰어든 거였죠.” 단이 말했다. 2년 전, 취업 스펙을 쌓으려 뉴스 취재 공모전에 참여했던 이들은 ‘불법 영상’을 주제로 자료를 찾다 지옥도를 발견했다. 공모전이 끝난 다음에도 참혹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특별히 논의할 것도 없이” 자연스레 ‘원팀’이 됐다.
불꽃은 트위터, 메일,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경로로 제보를 받는다. 제보는 유독 한밤중에 들어오곤 한단다. 떨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보낸 그 메시지에 담긴 마음이 무엇인지, 불꽃은 전부는 아닐지라도 깊숙이 공감한다. 들어온 제보의 상당 부분은 기사화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피해자가 원치 않거나, 2차 피해가 우려될 경우에는 보도하지 않는 원칙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불꽃이 보도하는 끔찍한 디지털 성범죄 사례들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뉴스레터를 시작한 이유는 더 많은 사람과 접점을 만들고, 한 사람의 피해라도 줄이고 싶어서다. 피해 사실을 알고도 속수무책인 피해자들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연대의 스크럼을 짜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기도 했다.
지난달 25일 첫 뉴스레터에 등장한 이들은 나무여성인권상담소의 현장 활동가인 ‘지지 동반자’들이다. 이들은 디지털 성범죄 수사 법률 지원, 피해자 상담, 증거수집 안내, 기관 연계 등의 활동을 한다. 첫 회에 이들을 소개한 이유는 편지를 읽는 누군가에게 지지와 연대의 메시지를 보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불꽃은 현장 활동가 인터뷰와 르포 기사를 번갈아 전달할 예정이다.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세차례 연속해서 보내온 두번째 주제는 ‘불법성착취사이트 아르(R)’에 대한 고발이다. “원래는 이 기획 기사를 제일 먼저 내보내려 했는데, 이런 악한 사건을 먼저 접하면 읽는 분들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2회로 밀어냈다.
가칭 아르는 현재 포털 사이트에서도 쉽게 검색이 될 정도로 접근이 쉽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에 걸려 접속이 막혀도 도메인을 변경해 운영을 지속하는 악성 사이트다. 이 사이트는 불법 유포되는 성착취 피해물을 ‘자료’라고 부르며 돈벌이를 한다.
시민들이 지난해 11월26일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등의 선고 공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성착취물 제작·유포 행위에 대한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불꽃은 지난여름, 아르 피해자로부터 제보를 받았다. 아르를 통해 피해 영상이 유포되고 있다며 도움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불꽃은 피해자에게 피해 신고 방법을 안내했다. 여러 국가기관에 신고를 하면 추가 유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두달도 되지 않아 같은 피해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삭제된 영상이 수없이 다시 업로드됐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사이트 운영진에게 직접 삭제를 부탁했으나, 오히려 삭제를 위해 본인 사진과 신분증 ‘인증’을 요구받았다고 불꽃에 제보했다.
해당 사이트는 이용자가 사진이나 영상 등 자료를 올릴 때마다 포인트를 제공한다. 포인트는 사이트 내에서 자료를 이용하고 더 수위 높은 게시판에 접근할 수 있도록 레벨을 높이는 데 이용된다. 사이트에 없는 새로운 자료일 경우 더 많은 포인트를 준다. 한번 영상이 삭제된다고 해도 다른 이용자가 복제된 영상물을 올리게 되는 배경이다.
불꽃은 아르의 실태를 파악하고자 사이트 회원으로 잠입해 지난 10월 한달간 집중 모니터링을 했다. 아르에서 이용자들이 더 많은 ‘자료’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레벨’을 높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당 사이트와 연동된 불법 도박 사이트에서 포인트를 충전하거나 사이트에 직접 돈을 입금해야 한다. 피해자 인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해 영상물을 재화나 유희로 취급한다는 의미다.
불꽃은 “각각의 게시판에는 각종 상업 포르노물과 영화, 불법 촬영물과 비동의 유포물 등 범죄 피해물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말했다. 가장 접근이 어려운 상위 레벨의 자료실에는 ‘당장 수사 들어가야 하는’ 피해 영상물들이 한가득 유포되고 있었다.
아르는 피해자가 삭제 요청 글을 남기면 무책임으로 응대하거나 아이디를 탈퇴시키고 사이트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아이피(IP) 주소를 차단하기도 한다. 피해자의 간절한 요청에 아르 운영진은 “(사진이나 영상) 지워지고 싶으면 공손하게 말하라”며 “정 지우고 싶으면 사이트 도메인이 나오게 셀카 찍어서 보내보든가. 그럼 고민해보겠다”고 답하는 식이라고 한다. 불꽃은 이런 악랄함에 분개한다.
불꽃레터는 올 연말까지 보내는 걸 목표로 한다. 뉴스레터 발송 기한을 한정적으로 잡은 이유를 묻자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일단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얼마나 지속가능할지 계산 같은 건 없다. 지금 이 순간 피해를 하나라도 줄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공통점이 있다”는 두 사람다운 답변이다.
연대하며 달리는 두 사람
디지털 성범죄 현장의 최전선에 선 목격자로서, 실시간으로 피해물을 모니터링해야 하는 입장에서 괴로운 마음이 들지는 않을까. 불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훼손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불법 영상물로) 공유되는 게 대부분 여성, 아동, 청소년의 신체인데, 그게 우리랑 다른 것이 아니지 않냐”는 것이다. 다른 일을 하다가도 문득 피해 영상이 잔상으로 떠오를 때도 많다.
하루 5시간 이상 약 100개의 디지털 성착취 대화방을 들여다보던 엔번방 취재 직후에는 전문 심리 상담을 받았다. 지금은 그때보다 덜하지만 여전히 피로도는 높다. 불은 말 없는 존재인 반려견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계속 안 좋은 것들을 보다가 귀여운 친구를 보면 녹아내리는 그런 기분이 들어요. 예전에 이수정 교수님(경기대 범죄심리학과)이 동물이 최고의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그게 뭔지 이제 좀 이해가 돼요.”
단은 “300억원 자산가가 되어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꿈”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곤 한다. “언젠가 디지털 성범죄를 주제로 한 연극을 본 적이 있는데, 한 중학생이 너무 갖고 싶은 가방이 생겨서 범죄의 늪에 빠지는 내용이었어요.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저희가 누군가의 조력자가 되면 좋겠다 싶었죠.”
디지털 성범죄 현장의 추적자이자, 20대 중반의 평범한 생활인들이기에 가능한 답변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둘 중 하나가 “앞만 보고 달리다가” 지쳤을 때 가장 먼저 알아보고 상대의 마음을 챙긴다. 서로에게도 연대자인 셈이다.
불꽃은 이달 말 보도할 두번째 기획 기사로 에스엔에스(SNS)상에서 벌어지는 온라인 그루밍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현재 트위터 이용자를 대상으로 설문을 돌리고 있다. 불꽃레터는 구독 신청 사이트(
url.kr/8i2sfy)에서 신청하면 이메일로 받을 수 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