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 영상을 재판에서 증거로 사용하는 데에 제한을 두는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인데, 일부 헌법재판관은 “미성년 피해자는 특별히 보호할 필요가 있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시민사회 단체들도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신고와 진술을 위축시킬 수 있는 결정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헌재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30조 6항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23일 재판관 6대3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해당 조항은 19살 미만의 성폭력범죄 피해자가 조사과정에서 진술한 것을 녹화한 영상물에 대해, 피해자나 조사 과정에 동석한 신뢰관계에 있는 사람 또는 진술조력인의 진술에 의해 사실이라고 인정(진정성립)한 경우,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조항은 미성년 피해자가 법정에서 받을 수 있는 추가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ㄱ씨는 2010년~2011년 위력으로 13살 미만 미성년자를 수차례 추행한 혐의로 1·2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자 해당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ㄱ씨는 재판과정에서 피해자 진술 영상을 재판부가 유·무죄 판단의 근거로 삼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1·2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신뢰관계인에 대한 증인신문 등을 거쳐 피해자 진술 영상물을 유죄의 증거로 삼았고, 피해자를 법정에 부르지 않았다. 이에 ㄱ씨는 “피해자가 법정에 나오지 않아 그에 대한 반대신문권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음에도, 법원은 신뢰관계인의 진술에 따라 피해자 진술의 증거능력을 인정해 유죄판결의 결정적 증거로 사용했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피해자를 법정에 불러서 진술이 맞는지를 따져봐야 했는데, 해당 조항 때문에 그러지 못해 방어권이 침해당했으니 헌법에 위반된다는 취지다.
헌재는 다수의견으로 ㄱ씨의 손을 들어줬다. 헌재 재판관 6명은 해당 조항이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조항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헌재는 “영상물에 수록된 미성년 피해자 진술은 사건의 핵심 증거인 경우가 적지 않고, 이러한 진술증거에 대한 탄핵의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그럼에도 심판대상조항은 진술증거의 왜곡이나 오류를 탄핵할 수 있는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헌재는 또 “피고인의 원진술자(피해자)에 대한 반대신문권 행사 자체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미성년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은, 그 재판 결과를 피고인에게 설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체적 진실의 발견도 위협할 수 있다”며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면서도 미성년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방지할 수 있는 조화적인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헌재는 ‘조화적인 방법’으로 △성폭력범죄 사건 수사 초기 단계부터 증거보전(피해자의 법정 증언이 곤란한 경우 판사를 수사기관으로 불러 한번 진술한 뒤 이를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하는 것) 적극적으로 실시 △피고인과 대면하지 않도록 중계장치를 통한 증언 △피해자 변호사제도 등을 들었다. 헌재는 “심판대상조항이 달성하려는 공익이, 제한되는 피고인의 사익보다 우월하다고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해 청구인의 공정한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반면 소수의견(이선애·이영진·이미선 재판관)은 이 조항을 두고 “청구인의 공정한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소수의견은 △피해자를 보호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서 수사 초기 촬영된 피해자 진술 영상은 신용할만한 정황이 있고 △피고인은 조사에 동석한 신뢰관계인에 대한 증인신문을 통해 진술 내용을 탄핵할 수 있으며 △재판부 또한 ‘수사기관에서 녹화된 피해자 진술’이라는 한계를 인지한 상태에서 논리와 경험칙에 따라 증거로 쓸지 말지를 판단할 것이기 때문에 “‘피고인의 권리 보장’과 ‘성폭력 미성년 피해자 보호’ 사이의 조화를 도모한 규정”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또 “(해당 조항은) 성폭력범죄의 미성년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의 방지가 불충분하였다는 현실 인식에 기초한 것인데, 이러한 입법자의 판단을 가볍게 볼 수 없다. 미성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입법자가 마련한 장치가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내용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시민사회 단체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여성인권위원회 오선희 변호사는 “미성년자나 지적 장애가 있는 성폭력 피해자경우, 전문적인 진술조력인이 장시간 노력하지 않으면 진술을 얻기가 어렵고, 이들이 법정에 출석하는데도 제약이 많기 때문에 이번 헌재 결정에 따라 사실상 무죄가 날 가능성이 커진다”며 “아이들이 법정에 나와서 가해자쪽으로부터 ‘너 거짓말 하는 거 아니냐’는 등의 반대 심문을 견뎌야 하고, 이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는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도 “미성년자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는 법익도 있는데, 이번 헌재 결정은 피고인의 반론권이 더 중요하다고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미성년 성폭력 가해자 대부분은 피해자에게 영향을 많이 미치거나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이미 권력 관계가 있는 상황에서 이번 결정은 가해자의 진술권 보장 차원이 아니라 피해자가 신고를 어렵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신민정 최윤아 박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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