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석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감염병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이 5일 대전 유성구에 있는 센터 내 연구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대전/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연구를 위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이트클럽을 가봤죠. ‘물뽕’이 사용되는 환경을 알아야 했으니까요.”
5일 대전 유성구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한겨레>와 만난 권오석(43)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감염병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은 ‘나이트클럽’을 언급하며 멋쩍게 웃었다. 권 연구원과 김우근 안전성평가연구소 예측독성연구본부 책임연구원 공동연구팀은 성범죄에 악용되는 마약인 지에이치비(GHB‧감마하이드록시낙산), 속칭 ‘물뽕’과 만나면 색이 바뀌는 화합물 개발에 성공했다. 성범죄 피해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물뽕 범죄에 노출돼왔는데, 누구나 쉽게 수 분 내로 ‘물뽕’을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구 책임자인 권 연구원은 “물뽕 특성상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증명하기 어렵다는 것이 큰 문제다. 버닝썬 사태로 한국에서도 ‘물뽕’이 범죄에 흔히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한번 잡아보자’라고 생각했다”고 연구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지에이치비는 무색‧무취‧무미의 중추신경 억제제로 몸 안에 들어가면 15분 이내에 몸이 이완되고 환각 증세와 강한 흥분작용을 일으켜 성범죄에 악용된다. 단기기억 상실을 유발하고 6시간 후면 대부분 신체를 빠져나간다. 피해자가 ‘물뽕’을 섭취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없고 의식을 되찾아 신고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시료 채취와 검출이 어렵다.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성범죄 피해자가 최근 5년간(2017~2021년) 국과수에 의뢰했던 8795건의 약물 검사 가운데 지에이치비 검출은 2021년 단 한 건에 불과했다.
연구팀은 수백번 실험 끝에 헤미시아닌 염료를 기반으로 지에이치비와 만나면 색이 바뀌는 화합물 개발에 성공했다. 물뽕이 들어간 음료을 누구나 볼 수 있는 색 변화로 찾을 수 있게 한 것이 처음이라 의미가 크다. 그간 지에이치비 등을 검출하기 위한 기술은 일반 시민들이 사용하긴 어려웠다.
권 연구원은 “과학연구 분야에 있는 전문가가 아니라 실제 피해를 볼 수 있는 시민들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일상에서 사용하기 쉽도록 형태에도 신경 썼다. 권 연구원은 “처음에는 가루로 만들었다가 다시 겔 형태로 만들었다. 점도가 있어서 화장품이나 신용카드 같은 소지품, 혹은 손톱 등에 쉽게 바를 수 있다. 거기다 ‘물뽕’을 조금 떨어트리면 노란색이었던 겔이 몇 분 내에 빨간색으로 바뀐다”고 말했다.
권오석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감염병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이 5일 대전 유성구에 있는 센터 내 연구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대전/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권 연구원은 연구 내내 철저히 피해자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실제 피해가 이뤄지는 곳을 살펴보기 위해 살면서 처음으로 나이트클럽을 가봤다. “클럽은 제가 입장할 수 없을 것 같았고, 나이트클럽을 가봤죠. 어두컴컴해서 겔이 빨간색으로 변한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권 연구원의 의견으로 어두운 환경에서도 색 변화를 감지해낼 수 있는 앱도 개발됐다. 색이 변한 겔 사진을 찍으면 눈으로 볼 수 없는 색 변화를 잡아낼 수 있다. “섬유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이번 기술이 적용된 마스크나 팔찌 제작도 가능해요. 개인정보 보호가 쟁점이 되겠지만 이론적으로는 색이 변한 팔찌를 앱으로 찍으면 바로 경찰 쪽에 전송되게 하는 것도 가능하죠.”
지에이치비 관련 피해를 끝까지 막겠다는 게 연구팀의 꿈이다. 신현영 의원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관세청은 지난해 밀반입 지에이치비 2만8800g을 적발했다. 2020년 적발된 양이 469g인 것과 비교하면 1년 만에 61배나 급증한 수치다. 범죄자들이 보통 2g, 반숟가락 정도를 술에 섞는 것을 고려했을 때 1만4400명에게 투여할 수 있는 양이다. 현재 이 기술은 기업에 이전돼 내년 말 이후 상용화를 준비중이다. 권 연구원은 “실제 판매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저렴한 가격에 판매돼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마약과 검출 기술은 창과 방패예요. 저희가 아무리 창을 만들어도 마약 제조자들은 새로운 합성 방법으로 방패를 만들죠. 끝이 없는 전쟁입니다. 하지만 범죄에 노출될 수 있는 피해자를 위해 저희도 끝까지 갈 겁니다.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요. 과학이 왜 필요한지 모두가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감염병연구센터 소속 권오석 선임연구원(왼쪽)과 김진영 연구원이 속칭 ‘물뽕'으로 불리는 마약인 지에이치비(GHB‧감마하이드록시낙산)를 색 변화로 감지하는 겔과 이를 자세히 판독하는 앱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제공
대전/이주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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