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31일 낮 가습기살균제 참사 공론화 10주년을 맞아 피해자와 유가족이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사망자 유품 200여점을 공개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를 논의해온 가해 기업 일부와 피해자들이 4월 말로 예정된 조정 기한을 연장하기로 27일 합의했다. 다만, 피해자 구제를 위한 재원 분담 비율이 가장 높은 옥시레킷벤키저와 애경산업이 논의에 불참하면서 이들 기업을 설득하는 일이 앞으로 남은 조정 작업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 등은 이날 서울 종로구 광화문 교보빌딩에 마련된 조정위 사무실에서 만나 조정 기한 연장 여부를 논의했다. 조정위에 참여한 전체 9개 기업 가운데 에스케이(SK)케미칼과 에스케이(SK)이노베이션, 엘지(LG)생활건강, 이마트, 롯데쇼핑, 홈플러스, 지에스(GS)리테일 등 7개 기업은 애초 이달 말로 정해진 활동 기한을 늘려 피해자들과 추가 협의를 하는 데 합의했다. 옥시와 애경은 이날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정위 관계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옥시와 애경 쪽 의견을 다시 물을 예정이다. 두 기업도 일부 조건이 받아들여지면, 조정 기한 연장을 재고한다는 입장이어서 설득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옥시와 애경이 제시한 조건은 ‘분담금 비율 조정’과 ‘종국성’ 등이다. 피해 구제에 대한 자신들의 분담률이 지나치게 높으니 이를 낮춰달라는 것과 조정위 결정에 따라 보상이 이뤄지면 더는 기업에 책임을 묻지 말라는 것이 이들 기업의 요구 사항이다. 옥시 관계자는 “제시한 조건이 받아들여지면 추가 협의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이들 두 기업은 29일께 연장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조정 과정에 참여하는 피해자 단체들은 연장에 대체로 동의한다는 입장이다. 참사가 공론화되고 11년 만에 마련된 기업과의 조정마저 무산되면 논의의 장이 다시 마련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송기진 가습기살균제 합의를 위한 피해자 단체 대표는 “지금은 또 다른 합의 기구를 다시 세우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조정위가 사명감을 갖고 기업들을 설득해 피해자들이 수용할 만 한 조정안을 만들어주길 바란다”고 했다.
앞서 조정위는 지난 3월29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에게 최대 5억3천여만원의 지원금을 제공한다는 내용의 조정안을 마련했다. 옥시와 애경은 재원 분담 비율이 불합리하다는 이유 등으로 불수용 입장을 밝혔고, 조정은 무산 위기를 맞았다. 옥시와 애경이 부담해야 할 몫이 전체 조정금액의 60%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정이 연장되면 기업과 피해자가 만나 지원 방안을 다시 논의하게 된다. 이 경우에도 재원 분담 비율이나 지원금 등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 조정은 불발될 수 있다. 조정이 무산되면 피해자 지원은 기존에 진행되던 환경부 차원의 구제급여 지급, 민사소송 두 방안으로 좁혀진다. 조정위는 ‘폭넓은 지원’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피해등급을 받지 못한 피해자 등에게도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으나, 조정이 무산되면 이들에 대한 지원도 요원해진다.
전문가들은 수천명이 피해를 입은 사회적 참사인 만큼, 기업뿐 아니라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대응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이번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경우 이미 정치권에서도 인정했듯 정부의 책임이 크다”며 “지금의 조정위는 정부가 빠진 사적 기구인데, 정부 또한 책임감을 가지고 피해자 구제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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