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충남 아산에 있는 경찰수사연수원에서 문을 연 법곤충감정실 보건연구사들이 감정 작업을 하고 있다. 경찰청 제공
2019년 6월 경기 오산의 한 야산에서 백골이 된 주검이 발견됐다. 수사팀은 그 해 초 주검이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유골 주위 곤충 번데기들을 분석했더니, 검정뺨금파리, 큰검정파리, 떠돌이쉬파리가 나왔다. 이 곤충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10월. 이를 통해 경찰은 암매장 시기를 2018년 10월 이전으로 재추정해, 수사 범위를 대폭 좁힐 수 있었다. 범인을 붙잡은 뒤 확인한 결과 사건은 2018년 9월8일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주검에서 발견한 곤충을 분석해 변사 사건 실마리를 해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에 맞춰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17일 충남 아산 경찰수사연수원에 국내 최초 ‘법곤충감정실’을 열었다.
아직 국내에선 낯선 ‘법곤충 감정’은 주검에서 발견한 곤충 종류와 성장 데이터 분석으로 사망시기 추정 등에 사용하는 과학수사기법이다. 곤충의 성장 속도 등을 분석해 짧게는 1~3일부터 월 및 계절까지 사망시각을 추정할 수 있다. 미국·유럽 등에선 이미 보편화한 기법이다.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미국 드라마 <시에스아이(CSI ) : 라스베가스> 주인공 길 그리섬 반장도 법곤충학자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구더기 등으로 사망시각을 확인하고 범인을 추적한다.
국내에선 일반적으로 변사사건이 발생하면 얼룩(시반)이나 경직 정도, 부검을 통한 위 내용물 소화 상태 확인 등으로 사망시각을 추정한다. 그러나 오래됐거나 부패한 경우엔 이런 방법만으로 사망시각 추정이 어렵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뒤 도주해 전남 순천에서 숨진 채 발견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변사 사건에서 처음
법곤충 감정이 적용됐다. 그가 언제, 어떻게 숨졌는지가 전국적 관심을 끌며 음모론까지 나왔지만 발견됐을 때는 이미 ‘반백골’ 상태였던 탓이다. 주검에서 발견된 구더기의 부화 시각을 추적한 결과 알에서 깨어난 시점으로 추정한 것은 6월4일이었으나, 6월2~4일 현장에 비가 내린 점을 고려해 사망시각을 6월2일로 결론 내렸다.
이후 경찰 과학수사 담당 직원들의 개인적 관심이나 전문성에 따라 제한적으로 법곤충 감정이 사건에 적용됐다. 그러나 국내 곤충 전문인력 부족, 한국 계절 및 지역 특성을 반영한 법곤충 데이터 미비 등으로 그동안 수사 활용은 제자리걸음이었다는 게 경찰 설명이다.
17일 충남 아산에 있는 경찰수사연수원에서 문을 연 법곤충감정실. 경찰청 제공
경찰은 법곤충감정실 개소를 계기로 법곤충 감정이 변사사건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수사를 지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나 동물에게 발생하는 구더기증(승저증) 분석으로 노약자에 대한 방임·학대나 동물학대·유기 등도 규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구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은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국가의 마지막 사회적 책무인 만큼 모든 변사사건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세밀하게 살피겠다”고 밝혔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