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전 9시20분께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주교좌 성당 앞에서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하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삭발식이 진행됐다. 박지영 기자
10일 오전 9시께 6∙10 민주항쟁 35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주교좌 성당 앞 공터에 흰색 천이 깔렸다. 고 장현구 열사 아버지인 장남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장과 유가협 가족 6명이 신발을 벗고 차례로 흰색 천 위에 앉았다. 이들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 먼저 하늘로 떠난 가족의 영정사진을 품에 안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발기에 잘려나간 새하얀 머리카락 뭉치들이 천 위에 쌓여갔다. 삭발을 끝낸 장남수 유가협 회장은 “가족을 잃은 설움도 큰데 삭발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가 막힌다”며 “20년 넘도록 정부와 정치권이 미룬 민주유공자법이 이제는 한시도 지체 말고 국회에서 통과되길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민주유공자법)’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민주화운동 참가자를 유공자로 인정하고 이들에 대해 교육·의료·취업 등의 지원을 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법이다. 지난 1월 별세한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고 배은심 여사는 민주유공자법의 제정을 마지막까지 촉구하며 국회 앞 농성에 참여하고 1인 시위를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유가협과 민주유공자법 제정 추진단 회원들은 “오늘은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긴 6월항쟁 35주년을 기리는 날이지만 우리 유가협 회원들은 남들처럼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며 “우리 유가협 회원들은 먼저 가신 이들의 완전한 명예 회복을 위해 한평생을 투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노력도 헛되이 아직도 제대로 된 명예 회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1998년 12월 422일간의 여의도 국회 앞 천막농성을 통해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키고 23년이 지나도록 ‘민주화운동관련자’라는 명칭에서 한 치 앞도 나가지 못한 채, 유가족들이 원하는 ‘국가유공자’라는 정상적인 호칭으로 불리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10일 오전 9시20분께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주교좌 성당 앞에서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하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삭발식이 진행됐다. 왼쪽부터 권희정 열사의 어머니 강선순씨, 장현구 열사의 아버지 장남수 유가협 회장, 박종철 열사의 형 박종부씨. 박지영 기자
20여년 전 발의된 민주유공자법은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됐다. 제15대 국회 때부터 10여 차례 발의됐지만, 소관 상임위를 좀처럼 넘지 못했다. 현재는 지난 2020년 9월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정무위원회에 계류돼있다. 민주화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한 829명을 민주유공자로 인정하자는 내용이다.
그러나 4·19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외에도 다양한 민주화운동 참가자에게 지원을 하는 것은 ‘과도한 특혜’라는 반론이 정치권 등에서 나오며 논의가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법안을 발의한 우 의원은 “법의 적용 대상은 800여명으로 제한적이다. 민주화운동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그중에 특별하게 희생당한 분들에 대해 평가하고 합당한 예우를 하자는 것에 대해 과도하다고 하는 것에 동의하기가 어렵다”고 반박해왔다.
이날 삭발식에도 참석한 우 의원은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민주유공자법을 통과시켜야 했는데 국회가 못해서 유가족분들께 정말 죄송하다. 뭐라 하셔도 변명할 거리가 없다. 고 배은심 여사께서도 민주유공자법을 절절히 호소하셨는데, 국회가 책임지고 해 나가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삭발식을 마친 유가협 가족들은 오전 10시부터 행정안전부가 주최하는 ‘제35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했다. 기념식에서는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유공자 19명이 국민훈장(모란장), 국민포장, 대통령 표창 등을 받았다. 삭발에 참여한 고 박종만 열사의 배우자 조인식씨는 이날 열린 기념식에서 남편에게 수여된 국민훈장을 아들과 함께 받았다.
10일 서울시 중구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열린 제35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서 삭발한 유가협 회원들이 ‘민주유공자법 제정하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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