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20대 후반 간호사 정아무개씨는 의료용 마약성 진통제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한달에 4~5명은 본다. 응급실 의료진의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는 이들이 진짜 환자인지, 혹은 거짓 통증을 호소해 마약성 진통제를 얻으려는 약물 오남용자인지를 가려내는 일이다. 정씨는 “예전에는 막무가내로 마약성 진통제를 요구하는 사람이 대다수였지만, 요즘은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20∼50대가 찾아와 약 처방을 거부하기 어렵도록 다양한 방법을 쓴다”고 말했다.
예컨대 병원 밖에서는 멀쩡히 담배를 피우며 전화를 하던 20대가 병원에 거의 기어오다시피 하거나, 평범한 행색의 중년 남성이 자정 전에 응급실에 찾아와 하루치 마약성 진통제를 맞은 뒤 자정이 지나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엑스레이·씨티(CT) 사진 등을 들고 와서 마약성 진통제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인천 지역 병원 응급실에서 7년간 일했던 한 간호사도 “아프다고 응급실에 와서 비마약성 진통제를 맞고 난 뒤에도 계속 아프다면서 마약성 진통제를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병원에선 응급환자의 경우 필요 시 약물 흡수가 빠른 주사로 의료용 마약류인 페티딘 등을 투여한다. 응급실 의료진은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상습범’에게는 처방을 거부하지만,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을 마냥 외면할 수는 없다고 한다.
22일 통계청의 의료용 마약류 처방 현황을 보면, 2019년 처방건수는 9967만7125건에서 2020년 9993만9580건수로 소폭 늘었다. 처방량을 살펴보면 같은 기간 16억8224만6346개에서 17억5138만9585개로 늘었다. 대부분은 꼭 필요한 환자들에게 처방됐지만, 의료용 마약류에 중독된 이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 박영덕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중독재활센터 실장은 “의료용 마약의 경우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중독자들이 약을 받기 위해 연극까지 하는 것”이라며 “센터 상담을 하다 보면 불법 마약뿐 아니라 의료용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도 해마다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의료용 마약 오남용 문제를 막기 위해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해부터 ‘마약류 의료쇼핑 방지 정보망’을 모든 마약류 의약품으로 확대해 시행하고 있다. 이전에는 프로포폴·졸피뎀·식욕억제제 등에 한해서만 정보를 제공했다.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거나 처방할 경우, 환자의 지난 1년간의 마약류 투약 이력을 조회‧확인할 수 있다. 서혜선 경희대 약학대 교수는 “이런 시스템이 생긴 것은 큰 성과”라면서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할 때 다른 의료기관에서 처방받은 마약성 진통제 처방 이력을 필수적으로 검토해 오남용 가능성을 낮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영덕 실장은 “의료용 마약류를 반복적으로 찾는 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기관과 제도 마련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했다.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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