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앞에서 임재성 변호사(왼쪽부터), 장완익 변호사,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이 강제동원 관련 민관협의회 피해자 지원단 및 대리인단 입장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외교부가 피해자 쪽과 사전 협의 없이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한 것을 두고 광주 지역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 단체들이 ‘소송 방해 행위’라며 강력 반발하고 나선 데 이어 서울 지역 피해자 지원 단체들도 “신뢰관계가 파탄 났다“며 정부의 민관협의회에 불참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외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법 마련을 위해 피해자 단체, 학계, 언론계 인사 등이 참여한 민관협의회를 출범시켰다.
3일 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 지원단과 대리인들은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외교부의 대법원 의견서 제출 및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외교부와 피해자 쪽 사이에 신뢰관계가 파탄 났다고 판단한다”며 “피해자 지원단·대리인단은 이후 민관협의회 불참을 통보한다”고 밝혔다.
앞서 외교부는 지난달 26일 미쓰비시중공업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김성주 할머니의 채권과 관련한 상표권·특허권 특별 현금화(매각) 명령 사건이 계류된 대법원 상고심 담당 재판부 2곳에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틀 뒤인 28일 이상렬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은 광주 시민모임 관계자들과의 면담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은 무엇이냐…현금화가 되기 전에 바람직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는 이날 사단법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쪽과 피해자 소송 대리인단을 만나 뒤늦게 의견서 제출 사실을 밝혔다.
피해자 지원단체들은 사실상 정부가 사법부에 ‘최종 판단을 미뤄달라’는 뜻을 전한 것으로 피해자들과 사전 논의 없이 의견서가 제출된 것 자체만으로 “신뢰 관계가 파탄 났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날 피해자 지원단체와 대리인단은 “재판거래 또는 사법농단이라는 범죄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민사소송 규칙을 그 범죄의 공범이었던 외교부가 과거에 대한 아무런 반성 없이 그 규칙을 다시 활용해서 강제동원 집행 절차를 지연시키려는 모습은 재판 거래 피해자들인 강제동원 소송 원고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모습”이라며 “민관협의회라는 공개적인 절차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음은 물론 피해자 쪽에 사전에 어떠한 논의나 통지도 없이 의견서가 제출됐고, 외교부는 이미 제출된 의견서조차 피해자 쪽에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밝혔다.
외교부가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한 근거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공익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선 민사사건에도 의견을 낼 수 있도록 규정한 민사소송규칙 제134조의2다. 해당 조항은 박근혜 정부 때 사법농단 논란의 핵심이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주도로 만든 것으로, 규칙 개정 당시부터 ‘강제동원 맞춤형’이란 비판이 나온 바 있다.
피해자 지원단체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결을 위해 ‘중재자’로 나선 외교부가 오히려 피해자들을 배제하며 권리를 침해했다고도 비판했다. 단체는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 행위는 실질적으로 피해자 쪽의 권리 행사를 제약하는 중대한 행위로 “이는 헌법이 보장한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발언에 나선 피해자 대리인단 소속 임재성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는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은)사실상 행정부가 사법부에 ‘부담스러우니 판단을 빨리하지 말라’는 입장 표명을 한 것”이라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과거에 있었던 불법 행위에 대해서 싸우는 것도 버거운데, 지금 한국 정부와도 이 절차 속에서 싸워야 된다는 게 굉장히 유감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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