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작가’라는 꿈을 키워가고 있는 지형(가명·16)이가 1일 대전시 자택 자신의 방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어머니가 보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웹툰 작가를 꿈꾸는 지형(가명·16)이의 방 한 쪽 벽은 직접 그린 그림들이 가득 붙어있다. 만화부터 일러스트, 유화 등 지형이의 넓은 미술 세계가 엿보인다. 둘러보면 ‘PIUDA’(피우다)라는 글씨가 그림 이곳 저곳에서 눈에 띈다. 그림마다 있는 지형이의 ‘서명’이다. “제 자아 같은 거예요. 꽃을 피우듯이 사람도 피우고 싶다는 의미로 붙였어요.”
지형이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 초등학생 때 여러 모양이 섞인 블록 장난감을 받으면 관절이 모두 돌아가는 사람을 만들어놨고, 지점토가 있으면 네댓시간씩 앉아 그리스 석고상같은 인체 모형을 만들어냈다. 인체 도감을 보고 슥슥 석고상을 그려내기도 했다. 지형이는 중학생이 된 뒤에도 색연필만 있어도 서너시간씩 그림을 그렸고, 독학으로 유화를 시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술 학원은 중학교 3학년이던 지난해 처음 가봤다. 지난 1일 대전에서 만난 지형이는 “학원에는 어떻게 그릴지, 뭘 그릴지 막힐 때 물어볼 사람이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학원에는 지형이에게 없는 ‘태블릿’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지형이는 요즘 하루에 6시간씩 방에서 펜으로 공책에 그림을 그린다.
엄마와 형, 지형이까지 세 식구 살림은 넉넉하지는 않아도 크게 부족하지는 않았다. 10여년전 아버지는 집을 떠난 뒤 양육비를 보내오기는커녕 연락도 잘 닿지 않았지만, 엄마(52)는 식당, 건물 청소, 요양보호사까지 닥치는대로 일을 하며 형제를 키웠다.
그러던 3년전 어느날, 엄마는 갑자기 젓가락을 쥐기 힘들 정도로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걸 느꼈다. 냄비 뚜껑도 무겁게 느껴졌고, 얼굴도 점점 창백해졌다. 처음엔 그저 피곤해서 그런 일이라고 넘어갔다. 한 요양시설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려고 채용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서야 심각성을 깨달았다. 의사는 직접 엄마에게 전화해 “큰 병원에 꼭 가보시라”고 신신당부했다.
까닭도 모른 채 인근 종합병원을 찾은 엄마는 “이렇게까지 혈소판이 적은 사람은 처음 봤다. 어떻게 병원까지 걸어오셨냐”는 놀란 의사의 반응과 맞닥뜨렸다. 엄마는 “내일 직장에 출근해야 한다. 일단 집에 가겠다”고 했지만, 의사는 “지금 당장 입원하시라”고 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피검사, 골수검사 등 다양한 검사를 했지만,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었다. 단지 ‘혈소판 감소증’이라고만 알려졌다. 혈소판 감소증이 있으면, 혈액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피로를 다른 사람들보다 쉽게 느낀다. 온 몸에서 알 수 없는 통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엄마는 2∼3달에 한 번씩 병원에서 수혈을 받고 있다. 엄마는 “골수이식을 하면 많이 나아질 거라고 했는데, 수술비만 수천만원인 데다, 돈이 있더라도 (골수) 공여자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고관절과 치아까지 문제가 번졌다. 병원에서는 “젊은 사람의 고관절이 이렇게 괴사하는 일은 못 봤다”고 말했다. 엄마는 최근 왼쪽 고관절 수술을 받았지만, 아직 오른쪽 고관절 수술은 못받고 있다. 치아 전체에도 통증이 생겼지만, 엄마는 “음식물을 씹을 때 통증이 심해, 그나마 통증이 덜한 앞니로만 식사를 하고 있다”며 “치아 전체를 임플란트 해야한다고 하는데, 몇백만원 이상이 들어간다고 하니 사실상 포기했다”고 말했다.
‘웹툰작가’라는 꿈을 키워가고 있는 지형의 습작 그림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엄마의 악화된 건강으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엄마의 난치성희귀질환으로 받는 정부보조금 80만원과 보조금 등으로 가족이 받고 있는 100만원가량이 수입의 전부다. 다행히 25살인 지형의 형은 아르바이트로 자신의 생활비와 학비를 벌고 있다. 그래도 엄마의 치료비와 월 25만원의 공공임대주택 월세, 지형이의 교육비, 생활비 등으로 적어도 한 달에 120만∼150만원이 지출된다. 매달 적자인 지형이네 가족은 벌써 부족한 생활비 때문에 빚을 수백만원 지고 있다.
지형이가 미술 공부를 하기에는 쉽지 않은 환경이다. 외부 지원이 없으면, 학원에 다니기도 어렵고 태블릿과 같은 미술 장비나 재료를 구입하는 건 ‘사치’일 수밖에 없다. 미술학원 원장 선생님은 지난해 엄마에게 “지형이 재능으로 작은 학원에만 다니면 안 되겠다. 더 큰 학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엄마는 당장 학원비부터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처음 다닌 ‘작은 학원’조차 재능이 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에게 지원해주는 외부 후원금을 받아 겨우 다닐 수 있었다. 지형이에게는 “‘엄마가 한 번 준비해보겠다. 기다려보자’고 했지만, 막막하다”고 했다.
지형이는 투정 대신 씩씩한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지형이는 “집에서 몇시간씩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괜찮다”고 했지만, “학원에는 그래도 그림이 막힐 때 물어볼 수 있는 선생님이 있어서 좋았다”고 기자에게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또 ‘웹툰 작가들이 대부분 작업할 때 쓰는 태블릿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물음에도 “별로 필요 없다. 종이에 그리는 게 몇 만배는 재밌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게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형이를 이전부터 만나온 후원기관 직원에게는 슬쩍 “태블릿이 갖고 싶다”고 말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갖고 싶은 것도 괜찮다고 말하는 지형이는 고생하는 엄마를 보며 일찍 철이 들었다. 초등학생이었던 지형이가 하루는 엄마에게 “내가 너무 민폐인 것 같아. 엄마가 나 때문에 고생해서 너무 미안해”라고 말했다. 지형이는 항상 엄마에게 미안하다며 “내가 엄마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돌려줄 거면 열배, 백배로 갚아라”라고 웃으며 받아쳤다. 지형은 요즘엔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잘 하지 않으려 한다. 지형이는 “원래는 늘 엄마 건강이 걱정됐다. 이제는 안 좋은 생각에 매몰돼 있는게 아니라, 앞으로 엄마 건강을 어떻게 챙겨야 할지 그런 미래지향적인 생각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웹툰작가’라는 꿈을 키워가고 있는 지형의 습작 그림과 고양이.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작가 되면 어려운 후배들 ‘피워내’고 싶어”
그림은 지형이가 마음을 다해 온전히 집중하는 대상이자 탈출구다. 지형이는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전에는 마음의 공허함이 있어도 에너지를 쏟을 곳이 없었다”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이걸 너무 하고 싶다’는 게 생겨서 어떤 그림을 그릴지, 어떻게 그릴지 고민하면서 하루종일 에너지를 쏟고 있다”고 말했다.
지형이는 “항상 걱정이 있었다.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힘들었던 적도 있지만, 학원 선배와 선생님들이 ‘지금 너는 그런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그려야 한다’고 조언해줬다. 지형이는 웹툰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 그래픽노블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을 상상력 안에서 그림으로 마음껏 해볼 수 있는게 그림의 재미”라는 지형이가 최근 쓰고 있는 웹툰의 시나리오는 “상처받은 남자 주인공이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다. 시련을 이겨낸 주인공 지형이가 꾸는 꿈은 또다른 자아 ‘피우다’라는 이름으로 미술 작가가 돼 미술 스튜디오를 여는 것이다. 지형이는 “스튜디오에서 ‘피우다’라는 이름처럼 환경이 어려운 후배들, 작가들을 피워내고 싶다”고 말했다.
캠페인에 참여하시려면
지형이 가족에게 도움을 주시려는 분은 계좌로 후원금을 보내주시면 됩니다(우리은행 285-999966-18-004 예금주: 월드비전). 네이버 해피빈에서도 후원에 참여하실 수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원하시는 분은 월드비전 대표번호(02-2078-7000)로 문의해주세요. 또한 후원에 참여하신 뒤 월드비전으로 연락하시면 기부금 영수증을 발행받을 수 있습니다. 목표 모금액은 1500만원입니다. 후원금은 지형이가 꿈을 잃지 않도록 미술학원비, 입시비용, 미술용품 구입비, 생계비 등을 지원하는 데 사용될 예정입니다. 월드비전은 지형이가 목표했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후원금을 투명하게 전달하고 보고하겠습니다. 목표 금액인 1500만원 이상 모금될 경우, 지형이 가정의 뜻에 따라 도움이 필요한 또 다른 가정에 지원됩니다.
보도 이후
<한겨레>와 굿네이버스가 함께한 ‘나눔꽃 캠페인’을 통해 희진이(가명)네 가족의 사연(<한겨레> 2022년 11월14일치 10면)이 소개된 뒤 1120만7390원(12월6일 기준)의 정성이 모였습니다. 216분의 후원자가 “희진아, 힘내! 이겨내자”라는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마음을 전해주셨습니다. 굿네이버스는 “희진이와 어머니를 위해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신 후원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전해왔습니다. 후원금은 희진이네 가정의 재활치료비, 의료용품 구입비, 긴급생계비로 전달됩니다. 또한 목표액이 넘는 금액은 희진이네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다른 위기가정에 지원될 예정입니다. 희진이네 가정에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신 모든 후원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