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한겨레>와 <한겨레21>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한겨레21>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
“유진아, 네가 결정해.” 최유진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엄마 서미정(50)씨는 줄곧 말했다. 미정씨는 2000년 11월13일 태어난 외동딸이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대로 살길 바랐다. 미정씨의 바람대로 유진은 적극적이고 당찬 학생으로 자랐다. 언젠가 유진은 이런 말을 했다. “어렸을 땐 엄마가 항상 뭐든 나보고 결정하라고 했을 때 너무 힘들었거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도움이 됐어. 뭐든지 내가 생각하고 잘 결정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제주도에 있는 국제학교 노스런던컬리지에잇스쿨(NLCS) 제주에 다니면서 유진은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을 배우며 국제공인음악자격시험(ABRSM)에서 최고등급까지 따냈다. 교내 오케스트라 수석을 맡아 2년 동안 팀을 이끌었다. 잘 놀고 공부도 잘하는 유진을 친구들은 ‘사기캐’(사기 캐릭터)라고 불렀다. “자기가 해내고 싶은 건 무조건 해내는 성격이었어요. 언니는 여러 방면에서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어요.” 유진의 국제학교 후배이자 친한 동생 이선우(20)씨의 말이다. 숨김없이 솔직한 유진을 친구들은 사랑했다.
“잘 아는 사람들은 저를 설명할 때 ‘대담하다’거나 ‘다르다’고 말합니다.” 유진이 미국 뉴욕대학에 지원하며 자신을 설명한 입시 에세이의 첫 문장이다. 2018년 겨울, 유진은 뉴욕대학에서도 가기 어렵다고 소문난 티시(Tisch) 예술학부에 조기 전형으로 합격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온라인수업을 듣던 어느 날, 유진이 문득 말했다. “엄마, 나 작사·작곡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 노래도 하고 싶어.”
유진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작업실을 얻고 싶다고 했다. 복학하기 전 1년만 독립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부산에 있던 미정씨는 걱정이 앞섰지만 딸의 결정을 늘 존중했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유진은 이태원에 작업실 겸 집을 얻었다. 음악감독 일로 가족과 떨어져 서울에 살고 있는 아빠의 집이 한남동이었던 터라, 어릴 때부터 유진은 이태원을 좋아했다.
곡을 준비하며 예명을 ‘아키’(AKI)라고 지었다. “엄마, 아키텍처(Architecture)라는 말이 있잖아. 뭔가 새로운 걸 만들고 창조하는 느낌이라 좋더라고. 일본어로 ‘아키'가 가을이라는 뜻이래. 나랑 엄마랑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가을이잖아. 좋지?” 2022년 5월, 아키의 첫 곡 <LOVE ME RIGHT>가 나왔다.
제주 국제학교 조회 시간에 최유진씨를 추모하고 있다. 유가족 제공
미정씨의 휴대전화에 유진은 ‘늘 좋은 우리딸'이라고 저장됐다. 2022년 10월29일 오후 4시, 미정씨는 유진에게 ‘택배를 받았냐’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전날 겨울옷과 영양제, 감기약 등을 챙겨 보낸 터였다. “엄마, 택배가 항상 보낸 날 이틀 뒤에 오는 것 같더라. 도착하면 챙겨 먹을게.”
그날 밤, 이태원 집에 있던 유진은 밤 9시50분께 평소 자주 가던 식당에 가려고 15년 지기와 함께 이태원 해밀톤호텔 뒷골목으로 향했다. 세계음식거리에 진입하자 사람이 너무 많아 앞으로 더는 갈 수 없었다. 유진은 밤 10시11분 친한 언니 양유빈(27)씨에게, 10시12분엔 선우씨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유진과 친구는 음식점 가기를 포기하고 다시 큰길로 나오려 했다. 해밀톤호텔 옆골목으로 들어서자 인파는 더 많아졌다. 항상 앞장서서 해결하길 좋아하던 유진은, 그날도 친구 앞에 섰다.
부산에 있던 미정씨는 밤늦게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참사 소식을 접했다. 아빠 최정주(54)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곧바로 유진의 작업실에 갔지만, 유진은 없었다. 연락이 닿지 않았다. 미정씨가 평소 유진과 친하게 지낸 선우씨에게 연락했다. 선우씨 역시 참사 소식을 듣고 불안해하던 참이었다. 밤 10시12분 이후로 유진의 카카오톡 메시지창엔 ‘읽지 않음’을 뜻하는 숫자 ‘1’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선우씨가 밤 12시 넘어 이태원으로 향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경찰관도 소방관도 그 누구도 유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빠는 근처 순천향대학병원에 가서 무작정 기다렸다. 마침 유진과 함께 이태원을 방문한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순천향대학병원에서 만난 그 친구는 ‘정신을 잃은 뒤 깨어났더니 유진이 없었다’고 했다. 밤 10시50분쯤 유진의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와 10초가량 연결된 기록만 남아 있었다.
다음날 새벽 2시께 미정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남편이었다. “정아, 우리 유진이가….” 서울의 병원에서 본 유진은 너무나 말라 있었다. 뼈만 남은 손을 잡아주고 차가운 얼굴을 만지며 미정씨는 생각했다. 빨리 쉬게 해주고 싶다고. 그 순간부터 장례식 때까지 미정씨의 기억은 끊겨 있다. 머릿속엔 하나의 생각만 되풀이됐다. 밤 10시50분까지 혹시 유진이가 살아 있었던 건 아닐까. 조금이라도 빨리 병원에 갔다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두 번째 음원 (항로이탈) 사진. 유가족 제공
장례식이 끝난 뒤, 국가의 대응을 보며 미정씨는 농락당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진의 납골당에 가던 어느 날, 운전하는 차 앞에 다른 차가 무리하게 끼어들며 위협한 적이 있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죽어도 미련이 없는데, 확 들이받고 죽어버릴까. 유진이에게 갈까.’ 국가트라우마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경찰로부터 받은 문자에 센터 담당자
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었다. 센터에선 “그런 담당자는 없고, 찾아본 뒤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만 했다. 만 하루가 지날 때까지 답은 오지 않았다.
참사 이후 경찰이 먼저 연락한 것은 딱 한 번이었다. 한 언론이 유족의 동의 없이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을 때다. 조처하고 싶으면 연락 달라는 문자메시지였다. ‘누구라도 (공개)해주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만나서 위로를 나눌 유족들을 찾아볼 수라도 있게….'
국가가 해주지 못한 위로를 다른 이들이 채워줬다. 유진이 다녔던 제주 국제학교에선 겨울방학 전 마지막 조회 시간에 유진의 노래를 틀었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추모편지를 적어 가족에게 보냈다. 음악실 한쪽에 유진의 이름을 붙인 방을 만들었다. 뉴욕대학엔 알리지도 않았는데 먼저 연락이 와서 유진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선우씨는 미처 발매하지 못한 유진의 노래가 생각났다. 부모님을 대신해, 선우씨가 직접 유통사에 전화했다. 자비를 들여 유진의 두 번째 곡을 세상에 내놨다. 그렇게 2022년 12월5일 <Off Course>(항로이탈)가 발매됐다. 현재까지 살아온 삶을 뒤로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는 내용을 담은 노랫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날 이후 미정씨가 살아야 할 이유는 단 하나다. 유진이가 사랑했던, 유진이를 사랑했던 이들을 지키는 일이다. ‘찌니가 사랑하던 사람들 잘 지킬 수 있게 엄마가 다 녹아내린 심장을 부여잡고서라도 애써볼게. 잘 견디다 갈게. 늘 좋은 딸 우리 유진. 편히 쉬고 있어다오.’
류석우 <한겨레21> 기자
raintin@hani.co.kr
제주 국제학교 후배가 유진씨에게 쓴 추모편지. 유가족 제공
제주 국제학교 선생님이 유진씨에게 쓴 편지. 유가족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