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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사법농단 세력의 ‘재판농단’…양승태 1심만 1522일째

등록 2023-04-12 05:00수정 2023-04-12 15:41

법정 향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연합뉴스
법정 향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연합뉴스

사법농단이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2011년 9월~2017년 9월) 사법부 행정 업무를 맡는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사법행정권을 남용해 재판에 개입하고 법관의 독립을 침해한 사건이다. 2017년 2월 법원행정처에서 일하게 된 이탄희 당시 판사가, 판사들의 사법 개혁적 학술대회를 저지하라는 업무 지시를 거부하면서 ‘판사 뒷조사 문건’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세차례의 법원 내부 진상조사(2017년 4월, 2018년 1월·5월)가 진행됐고 검찰 수사로 2018년 11월~2019년 3월 전·현직 판사 14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3월27일 서울중앙지법 서관 508호 소법정에서 임종헌(64)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192차 공판기일이 열렸다. 법정에는 재판부(형사36-1부)와 검사, 피고인과 변호인, 증인과 풀 기자, 법원 실무관이 전부였다. 이날 검찰은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 노동고용비서관실 행정관으로 일했던 김아무개씨를 증인으로 불렀다. 2013년 10월 있었던 고용노동부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노동조합 아님’ 통고 처분과 이에 따른 전교조의 취소 소송에 대해 묻기 위해서다.

10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김씨가 답변을 주저하자 검사가 물었다. “검찰에서 조사받으신 내용 기억 안 나죠? 1회 조서를 봐주시겠습니까. 검찰에서 이렇게 답했다면 당시에는 기억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검찰 수사도 5년 전, 2018년의 일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요. 검찰 조사 받을 때 답변을 한 것 같지만,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법농단 사건’이 점차 잊히고 있다. 2018년 11월14일 임 전 차장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이나 전교조 법외노조 처분 사건 등에 개입해 청와대와 거래했다는 등의 혐의로 형사36-1부(재판장 김현순)에 넘겨졌다. 형사35-1부(재판장 이종민)가 심리 중인 양승태(75) 전 대법원장, 박병대(65)·고영한(68) 전 대법관 사건은 2019년 2월11일 기소됐다. 12일 현재 임 전 차장의 1심은 1611일째, 양 전 대법원장 1심은 1522일째 진행 중이다. 사법연감을 보면, 2022년 구속 피고인의 1심 평균 처리 기간은 122.9일이다.

 증거 부동의로 증인만 173명

늑장 재판의 첫번째 원인은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 등 피고인 쪽에서 검찰의 조서와 증거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았기(부동의) 때문이다. ‘증거 부동의’가 되면 재판부는 검찰 조서의 원진술자, 증거 서류의 작성자 등을 법정으로 한명 한명 불러 신문해야 한다.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는 127명의 증인이, 임 전 차장 재판에는 173명의 증인이 출석했다(12일 기준, 중복 포함). 재판 초기에는 증인으로 소환된 판사들이 출석하지 않아 재판이 늘어졌다. “증인 신문 기일 다음날과 그다음날 재판이 있어 재판 준비를 해야 한다”(정다주 판사) “재판 일정과 중복된다”(시진국·김민수·박상언 판사)는 이유를 들었다. 심지어 “법원 체육대회가 예정돼 있다”(전지원 판사)고도 했다. 재판부는 정당한 불출석 사유가 아니라며 과태료 100만원을 부과하기로 했다가 이후 전 판사가 증인으로 출석해 증언을 마치자 과태료 부과를 취소했다.

두번째는 재판부와의 다툼이다. 임 전 차장은 재판장인 윤종섭 부장판사를 상대로 두차례나 법관 기피신청을 냈다. 형사소송법 제18조는 법관이 불공평한 재판을 할 염려가 있을 때 법관에 대해 기피 신청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기피 신청을 하면 재판은 중단된다. 첫번째 기피 신청(2019년 6월)은 자신의 추가 구속영장 발부에 문제가 있다고, 두번째(2021년 8월)는 재판장이 유죄 심증을 갖고 있다는 한 언론보도 때문에 이뤄졌다. 기각과 항고가 반복되는 동안 윤 부장판사는 법관 정기인사로 이동했고 2022년 2월 재판부가 교체됐다.

증인 진술 녹음 재생만 7개월

세번째는 ‘이례적으로’ 원칙적인 공판갱신 절차다. 형사소송규칙 144조를 보면, 재판부가 변경되면 증인 진술과 증거 서류 등을 다시 조사하도록 돼 있다. 통상적으로는 당사자(피고인)의 동의를 얻어 약식으로 공판갱신 절차를 거치지만, 이들은 원칙적인 공판갱신 절차를 요구했다. 양 전 대법원장 재판의 재판부가 2021년 2월 모두 교체됐는데, 증인 진술 녹취파일을 하나하나 재생하는 데에만 7개월이 걸렸다. 부장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일일이 다 증거조사 하는 게 원칙이지만 일반적이지는 않다”며 “재판 지연 의도가 다분하다”고 말했다.

수십만쪽에 이르는 방대한 검찰의 수사 기록이 재판 지연의 네번째 원인으로 꼽힌다. 재판부가 재판의 속도를 내려 할 때마다 변호인의 반대가 거셌다. 임 전 차장 재판 초기에 재판부가 주 4회 집중 심리를 제안했다가 변호인단이 집단 사임하기도 했다. “기록이 너무 방대해 재판 준비할 물리적 시간이 매우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검찰 관계자는 “(이렇게 재판이 지연된 경우는) 처음 보는 사례이고 우리도 답답하다”며 “내용이 많은 것은 혐의가 많기 때문이지, 검찰이 일부러 자료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론의 관심이 줄어들면서 감시와 견제도 느슨해졌다. 지난 1월에 장동혁 국민의힘 의원의 증인 신문이 비공개로 진행됐다. “원내대변인이라 언론에 보도될 경우 파장이 예상된다”는 이유로 임 전 차장이 비공개를 요청했고 재판부가 받아들였다. 공개 재판은 헌법상 원칙이며, 법원조직법은 ‘국가의 안전보장, 안녕질서 또는 선량한 풍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비공개하도록 했지만, 장 의원에 대한 비공개 신문에 아무런 제동도 걸리지 않았다.

 “모두 다 하면 사법 시스템 마비”

사법농단 재판이 이례적으로 장기화하면서 그 배경을 두고 일각에서는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 등이 대법관 구성이 보수화하길 기다리며 의도적으로 재판을 지연한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부장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재판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상고심을 염두에 두고 (보수적인) 대법관 구성 변화를 기다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현직 판사는 “이슈의 중심에서 멀어지려는 재판 지연 전략으로 보인다. 이목이 쏠리는 사건은 판사들이 무거운 양형을 선고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라는 관점에서 재판 지연을 무작정 비판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고위 법관 출신의 피고인들이 사상 초유의 재판 지연 사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의 여연심 변호사(민변 사법센터)는 “모든 사람이 자신들처럼 재판을 진행한다면 현재의 사법 시스템은 사실상 마비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정혜민 기자 jh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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