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한 쌍이 서울 종로구 경복궁에서 결혼을 앞두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내가 1억이 모인다. 그러면 저는 그때부터 이제 결혼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만약 안 된다면 늦어진 그대로 그냥 죽 살아가지 않을까요.” (29살 남성, 경남 거주 항공기계 조립원 ㄱ씨, 월수입 200만원, 정규직)
“회사 다니면서 돈을 모은다는 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뭐 1억은 돼야지 결혼한다는 거는 사실 여자도 동일한 것 같아요. “(40살 여성, 서울 거주 금융회사 마케터 ㄴ씨, 월 550만원, 정규직)
“어디 한 군데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야지 어떤 플랜도 짜는 건데…현실적으로 그렇게(하기가 어렵죠)”(33살 남성, 부산 거주 경비 보안직원 ㄷ씨, 월수입 230만원, 비정규 계약직)
결혼하지 않은 20대에서 40대 사이 미혼 남녀의 말이다. 이들은 결혼하지 않거나 늦추는 이유에 대한 물음에 공통으로 ‘자산 1억원’을 말했다. 1억원은 결혼 비용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금액으로 보인다. 결혼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경제적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는 뜻으로 그렇지 못할 때는 미루는 게 바람직하다는 게 이들의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ㄷ씨 말대로 비정규직은 물론 괜찮은 정규직이라고 해도 세간에서 말하는 ‘결혼적령기’에 1억을 모으기는 쉽지 않다. 만약 거주지가 서울이나 수도권이라면, 전셋집 구하는 것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가족형성과 사회 불평등 연구’ 보고서를 7일 보면, 최선영 박사팀은 지난해 6월부터 8월까지 전국 각지에 사는 40명의 미혼 남녀를 만나 심층면접 조사를 벌였다. 청년세대의 결혼에 대한 의식을 깊게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조사 결과, 3명의 ‘비혼주의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남녀는 결혼을 결코 기피하지 않았다. 아니 희망했다. 다만 당장 할 의사가 있지 않다고 응답했다. 연구진은 이를 결혼을 미루는 ‘결혼 지연’ 행위라고 규정했다.
실제 연구진이 지난 1998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노동패널 자료를 이용해 분석해보니, 30살 시점의 미혼율은 1969년생 남성의 경우 37.3%였는데, 89년생 남성에서는 73.5%로 높아졌다. 69년생 여성도 이 비율은 13.8%에 불과했으나, 89년생 여성에 이르러서는 53.3%로 증가했다. 20년 사이에 30살 시점 미혼율이 남성은 두배, 여성은 네배 가까이 는 것이다.
왜 이런 결혼 지연 행위가 나타나는 걸까? 미혼 남녀의 답변을 분석해본 결과, 이들은 “안정된 직업과 소득, 자산을 갖춘 ‘가족경제’라는 경제적 기반 위에서 결혼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의 소득과 자산으로는 집을 사거나 임대하기 위한 결혼자금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몇 년간 돈을 모을 수 있으면 “그때 적극 결혼을 고려해보겠다”는 인식을 보였다는 게 연구진의 분석이다.
실제 조사에 참여한 여러 미혼남녀 사례는 이를 실증적으로 잘 드러낸다. 서울에 사는 서른살 남성 ㄹ씨는 프리랜서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다. 지방의 전문대를 나와 더 나은 일자리를 위해 서울로 온 그는 지금은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소득(월수입 200만원)을 높이는 일에 집중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서른둘의 부산에 사는 ㅁ씨도 비슷하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 강사를 오래 한 그는 지금은 지방대에서 계약직으로 사무노동을 한다.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자신의 커리어가 불안정해 결혼 상대로 확정하기엔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39살의 서울 거주 여성 ㅅ씨는 “20대 후반에 결혼을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결혼해야 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해 헤어졌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결혼을 하면, 나는 분명히 일 안 하고,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운을 뗀 ㅅ씨는 결혼과 출산은 ‘젊은 시절의 종결’이자 ‘제약’이라고 말했다. ㅅ씨는 “자유로운 여가를 즐기고 자신을 탐색할 기회를 갖기 위해선” 결혼을 최대한 늦추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ㅅ씨가 말한 기회와 탐색도 어디까지나 상위계층의 미혼남녀에 해당하는 것이다. 가난한 저임금의 미혼남녀는 ‘결혼만이 아니라, 여유롭고 즐길 수 있는 삶도 지연’되는 상황이다.
이런 미혼남녀의 결혼 지연 행위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전략적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다만 성별 간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연구진은 파악했다. 남성은 결혼 자격을 갖추기 위한 시간벌기 혹은 결혼 전 노동 기간을 늘리는 수단의 성격이 강했지만 여성은 경력단절이나 양육 같은 결혼에 따른 변화를 최대한 후일로 늦추려는 점이 강하다는 점이다. 여성의 결혼 지연은 다양한 사회적 불이익과 가족 내의 불평등에 대한 반응적 행동에 가까운 셈이다.
최선영 박사는 보고서에서 “결혼 지연은 당장 결혼으로 이행하는 걸 지양하는 행위로 남녀 모두에게서 부족한 자원을 늘리거나 결혼으로 인한 불이익을 최소화하려는 전략적 수단”이라며 “개인과 가족에 대한 사회적 보호체계를 촘촘하게 구축하고, 일과 생활 균형이 당연한 권리로서 구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창곤 선임기자
go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