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4월1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브리핑룸에서 열린 2차 내각 발표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소개하고 있다. 인수위사진기자단
지난 1일 건설노동자가 제 몸에 불을 붙였다. 전세계 노동자의 생일인 노동절 당일이었다. 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직전이었다. “죄 없이 정당하게 노조 활동을 했는데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및 공갈”이라며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린 직후였다. 같은 날 윤석열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노동절 메시지를 올렸다. “진정한 노동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노사법치주의를 확립하고, 우리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기득권의 고용세습을 확실히 뿌리 뽑을 것이다.” 양회동 건설노조 강원지부 지대장은 분신 이튿날 목숨이 뿌리 뽑혔다. 1970년 전태일 열사는 법을 지키라며 분신했지만, 2023년 노동자는 대통령의 ‘헌법 정신’에 항거해 분신했다.
‘헌법’과 ‘법치’는 윤 대통령 통치 언어의 근간이다. 역대 모든 대통령이 헌법 제69조의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로 시작하는 취임 선서를 했지만, 윤 대통령은 취임 뒤로도 하루가 머다고 취임 선서다. 빈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맥락은 생급스럽다. 그는 지난해 11월 동남아 순방 때 <문화방송>(MBC)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배제하며 “헌법 수호 책임의 일환으로써 부득이한 조치”라고 했다. 문화방송은 대통령의 ‘헌법 수호’에 맞서 헌법소원을 냈다. 헌법소원은 공권력에 침해당한 헌법상 기본권의 구제를 청구하는 행위다. 헌법재판소는 문화방송의 청구를 심판에 회부했다. 장차 헌재 판단도 헌재로서의 헌법 수호 행위일 테다. 윤 대통령이 1년 내내 뿌린 언어의 씨앗에 대한민국 헌법은 분열의 상징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24일 경남 사천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서 열린 방산수출 전략회의에 앞서 야외전시장에서 KF-21 등을 살펴본 뒤 이동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지난 3일 13개 시민사회단체가 ‘윤석열 정부 1년 평가토론회’를 열었다. 경제 정책을 필두로 10개 분야에 걸쳐 정책 평가가 이뤄졌다. 사실상 행정부가 관할하는 모든 분야에 해당하는 평가였다. 전체를 관통하는 열쇳말은 ‘퇴행’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장유식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법센터소장이 발표한 ‘권력기관 운영 평가’는 윤석열식 헌법 정신과 법치주의가 무엇인지를 강력하게 암시했다. 장 소장은 윤석열 정부 1년을 ‘검찰공화국’으로 규정했다. 검찰주의 행정과 검찰 편중 인사가 행정 조직 법률주의라는 헌법 원칙 위반, 삼권분립 및 사법부 독립이라는 헌법 원칙 위배, 견제와 균형 실패로 이어졌고, 행정안전부 경찰국 신설과 이른바 ‘검수원복’ 등 시행령 통치로 법치주의를 파괴했다는 진단이었다.
새삼스럽지는 않다. 대통령실과 정부 핵심 권력기관뿐 아니라 검찰과 선이 닿기에는 너무 아득한 곳까지 검찰 출신이 장악하고, 국민의힘 대표를 축출하거나 뽑는 과정에 대통령의 뜻이 별다른 저항 없이 관철되고, 야당 정치인 수사는 인디언 기우제처럼 이어지고,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법률이 대통령에 의해 거부되고, 일제 전범기업에 대한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과 검찰 수사권 축소 법안이 유효하다는 헌재의 판단 취지가 무시되고…. 지난 1년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는 사례로 수없이 거론됐고, ‘이런 정권은 처음’이라는 장탄식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을 ‘헌법 원칙 위반’과 ‘법치주의 파괴’로 명토 박은 대목에 저절로 밑줄이 그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5월2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지난달 더불어민주당이 야당 몫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으로 추천한 허상수 ‘재경 제주4·3 희생자 및 피해자 유족회’ 공동대표를 대통령실이 임명에서 배제했다. ‘선고유예 기간(2년) 중에는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없다’는 국가공무원법 33조를 결격 사유로 내세웠다. 허 대표는 국가보위법 위반으로 40년 전에 받은 유죄 판결에 대해 2021년 8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헌재가 위헌으로 결정한 국가보위법에 의해 부당하게 받은 처벌을 구제하는 취지였다. 다만 직장에서 해고된 뒤 개인 물건을 가지러 사무실에 들어간 것에 대해 일반 형법(건조물 침입 등)을 적용한 부분은 재심 사유가 되지 않아 선고유예로 형량만 낮춰졌다.
최근까지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을 지낸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통령실의 임명 배제가 헌법 제13조(일사부재리), 제25조(공무담임권), 제27조(재판청구권)을 위반했다고 지적한다. 이미 40년 전에 처벌이 끝난 사안으로 공무담임권을 침해해 이중처벌했고, 재심청구권의 취지도 침해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재심의 유죄 판결 부분은 법적으로 효과를 부담하지 않는데, 대통령실은 판결 취지를 무시한 채 문자적으로만 해석해놓고 법치주의라 우기고 있다”며 “이런 식의 해석은 동서고금에 전례가 없다”고 일갈한다.
헌법의 ‘헌’(憲)은 가르침, 깨우침이라는 뜻이다. 영어 ‘Constitution’(헌법)에는 체질, 구조라는 뜻이 담겨 있다. 130개의 조문으로 된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지향, 구성 요소, 추구할 가치, 국민의 기본권과 의무, 권력 구조, 국가의 의무 등이 들어 있다. 모든 법 위의 법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국가 공동체의 규범적 가치를 망라한 것이다. 그러나 선언적 성격의 문헌이 대개 그렇듯, 해석의 행간은 꽤 넓다. 그 해석을 두고 경합이 벌어지기도 한다. 헌법은 최종 해석의 책무가 누구에게 있는지도 헌법 안에 담고 있다.(제6장 ‘헌법재판소’) 그러나 윤 대통령의 헌법 정신에는 이런 기본적 헌법 원리가 없다. 대신 헌법 정신과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그 정신과 주의를 파괴한다.
2022년 7월26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 도중 포착된 권성동 당시 국민의힘 원내대표의 휴대전화 화면. 윤석열 대통령은 이준석 대표를 겨냥해 “내부 총질이나 하는 당대표가 바뀌니 달라졌습니다”라고 말했고, 권 원내대표가 “대통령님의 뜻을 잘 받들어 당정이 하나 되는 모습을 보이겠습니다”라고 답하자 윤 대통령이 ‘체리 따봉’ 이모티콘을 보냈다. 공동취재사진
윤 대통령에게 헌법은 사실상 형법과 동격이다. 지난 2월21일 국무회의에서 ‘건폭’이라는 신조어를 세상에 처음 던지며 “건설 현장의 갈취, 폭력 등 조직적 불법행위에 대해 검찰, 경찰, 국토교통부, 고용노동부가 협력해 강력하게 단속하라”고 지시한 것이 했다. 건설노조의 활동을 조직폭력배의 갈취와 동렬에 놓고, 공권력을 총동원해 조폭 때려잡을 때처럼 때려잡으라고 한 것이다. 경찰은 1계급 특진을 내걸었고, 공정거래위원회는 노동자를 사업자로 간주하는 편법으로 과징금을 물렸다. 그 와중에 윤 대통령은 헌법 정신을 입에 올려 몸소 거룩해지는 한편 헌법의 형법화, 형법의 헌법화를 도모한다.
헌법 정신과 법치주의를 맥락 없이 갖다 붙이는 윤 대통령의 언어 습관은, 그러나 나름의 일관성을 띤 검찰주의자의 역설적인 면모다. 검찰의 존재 증명이 ‘살권수’(살아 있는 권력 수사)에 있다는 검찰주의자들의 믿음에는 검찰이 법치 실현의 최종심급이라는 자의식이 투사돼 있다. 행정부 일개 외청인 조직의 위상을 자가발전으로 드높이고, 심지어 검사 개개인을 헌법기관이라고 참칭하는 것도 검찰주의자들의 오랜 버릇이다. 검찰 최고 수뇌에서 대통령 자리로 직행한 검찰주의자는 자기 존재와 헌법 정신을 동일시하는 한편, ‘시행령 법치주의’로 영화 <넘버3>의 검사 마동팔처럼 마약 수사까지 만기친람한다. 검찰은 국가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대한민국은 검찰공화국’이라는 신화는 헌법 정신과 법치주의를 되뇌는 윤 대통령의 정신세계를 이룬다.
시민사회 토론회에서 진단된 국정 전 분야의 ‘퇴행’이 윤석열 정부 1년의 열쇳말이라면 열쇠 구멍은 헌법과 법치의 퇴행이다. 대한민국이 검찰공화국이라면 각별히 헌법 1조 1항이 퇴행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민주), 공동체의 원리에 따라 국가가 운영돼야 한다(공화)는 최상위의 헌법 규범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결합이 헌법 정신 가운데서도 가장 윗길인 셈이다. 그런데 ‘공화주의’는 일반인들뿐 아니라 전문가들도 관심과 이해가 크지 않다. 헌법학자인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금의 위기를 민주주의의 위기로만 보는 건 여러모로 한계가 있다”며 “민주공화주의의 위기, 그 가운데서도 공화주의의 위기를 중시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정치학자들 가운데는 정상적으로 선거가 치러지고 언론과 집회의 자유 등 자유권적 기본권이 일정 수준 보장되면 민주주의 체제로 인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공화주의와 만나면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공화주의는 개념의 스펙트럼이 넓고 이해도 복잡하지만 기본적으로 공공선과 공공성, 공유, 공존, 분권, 균형, 견제, 자율, 숙의 등의 속성을 포함한다. 검찰공화국은 곧 공화주의의 부재다. 검찰의 권력 독점은 분권, 균형, 견제의 원리와 충돌한다. 나아가 국회의 의정 활동, 전임 정부·지자체의 정책 사안까지 모든 영역을 형사사법화해 자율성을 질식시킨다.
김건희 여사가 지난 3월31일 ‘202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개막식에 앞서 네덜란드 정원을 둘러보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는 공화주의와의 관련성에서 한층 복잡한 논쟁 지점을 낳는다. 퍼스트레이디(퍼스트 젠틀맨)의 역할이 명확히 규정된 국가는 없다.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은 퍼스트레이디 시절 백악관에서 의료보험 개혁을 주도했고,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도 활발한 ‘참여형’ 영부인이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의 공·사 경계에 관한 자율성의 범위는 공동체가 축적한 역사적 산물이고, 이 또한 공화주의적 방식(자율, 숙의)일 수 있다. 대선 때 ‘조용한 내조’를 공언했던 김 여사가 약속을 어겼다는 비판은 가능하지만, 대외 활동 자체가 논란이 되는 건 공화주의적 문화의 미성숙을 방증한다는 지적도 있다. 인사 개입이나 무속인 논란 등은 사실관계부터 엄격히 규명하고 판단할 사안이다.
정작 김 여사와 관련한 논란을 키우고 있는 장본인은 검찰이다. 민주공화주의의 자율성을 질식시키는 검찰의 형사사법 만능주의가 김 여사 앞에서는 더없이 너그러워진다.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에 김 여사가 연루됐을 개연성을 보여주는 여러 물증과 정황에도 불구하고 검찰 수사는 유독 김 여사에 대해서만 손을 놓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과 민주공화주의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사법적 특권을 배제한다. 법치주의가 성립하려면 자의적 권력 남용 금지라는 규범부터 지켜져야 한다. 분권과 자율성의 영역까지 온갖 법조항을 짜깁기해 법치주의를 들이대는 것도 문제지만, 선택적으로 수사하지 않는 것도 법치주의 이름을 파는 반법치주의, 반공화주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0월30일 오전 서울 용산 이태원 참사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윤석열 정부 1년에서 제대로 주목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하지 않기’다. 현재 정부에서 작동하는 분야는 검찰, 그리고 대통령이 콕 집어 발본색원을 지시한 업무 말고는 없다. 민생을 비롯해, 검찰의 시야각에서 벗어난 국정 영역이 철저히 방치돼 있다는 탄식이 공직사회에 파다하다. 정책이 형사처벌 대상이 되는데 접시를 닦다 깨뜨릴 위험을 감수할 관료는 없다. 여당 또한 내부의 균형과 견제가 사라지고, 대통령실의 의중을 관철하고 극우세력의 스피커 노릇을 하는 데 머물며 정책 정당의 면모를 상실했다. 대화와 협상의 국정 원리인 정치도 실종됐다. 이태원 참사는 대통령과 정부, 국회가 ‘정치적 책임성’이라는 민주공화주의의 규범을 망각하면 당장 국민의 생명부터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입증했다.
사회학자인 엄기호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일본과 밀착하면서 유난히 ‘보편 가치’를 강조하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짚는다. 윤 대통령이 말하는 보편 가치는 ‘자유’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의 ‘기울어진 자유’(
‘윤 대통령 494번의 “자유”는 누굴 위한 자유인가’) 또한 자유의 독점이라는 공화주의 파괴의 한 단면이다. ‘모두의 자유’에 대한 지향이 곧 공화주의다. 그러나 우리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갈수록 개인의 권리의식에 몰입하고 있다. 민주진보 정치세력은 보편 가치로 공화주의를 내세우는 데 소극적이다. “민주진보 정치세력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공화주의를 보편가치로 제시하느냐가 민주주의를 재생하는 데 관건이 될 것이다.”(엄기호 교수)
안영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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