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는 창간 35돌 기획으로 국제입양인 20명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지난 5월11일은 입양의 날이었고 올해는 국제입양 70주년이다. 칠레·아일랜드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국가 차원의 인권침해 조사를 곧 시작하기도 한다.
산 역사의 주인공들을 섭외해준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DKRG)은 덴마크를 비롯한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 네덜란드, 미국 등 10개국에서 650여명이 가입한 세계 최대의 한인 입양인 커뮤니티다. 지난해 8월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334건의 입양 사례를 제출하며 조사를 신청해 12월 ‘해외입양과정 인권침해 사건’ 조사 개시를 이끌어낸 바 있다. 진실화해위는 오는 6월부터 코펜하겐·오슬로 등 현지 조사에 나설 계획이다. 세계 20만명으로 추산되는 국제입양인들의 이목이 여기에 쏠려 있다.
<한겨레>는 영아 매매, 기록 위조 등 출생과 함께 부당하게 취급된 자신들의 역사를 뒤져 진실과 정의를 회복하려는 국제입양인들의 열망을 존중한다. 20명이 짧게 쏟아낸 과거사 속엔 조사 대상자로서 진실화해위에 거는 기대가 함께 담겨 있다.
부모님 이름 알 수 없어 버려진 건 내탓일까 생각
마리아네 옥 닐센(입양 당시 9개월 추정, 현재 50살, 덴마크)
덴마크의 자상한 양부모 집에서 평화롭게 자라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친엄마 이름을 알 수 있는 특권을 누린 적 없습니다. 누가 저를 9개월 동안 뱃속에 품고 있었을까요?
어른이 돼서야 저는 “생후 6개월에 대전 거리서 발견됐다”는 입양 서류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른이 되면서 엄마가 저를 포기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거라 믿게 됐지만, 제 신경계는 제 잘못일 거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큰 의문이 생겼습니다. ‘왜죠? 사랑하는 엄마, 왜 저를 떠났나요? 왜 저를 지키지 못하셨나요? 왜 저를 찾지 않으셨나요?’ 친엄마를 찾고 싶습니다. 엄마는 살아 있을까요? 우리가 더 이상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사랑을 나누었으면 좋겠어요.
친엄마가 가난해 딸 포기, 가족상봉뒤 진실 알게 돼
김동희 스테파니(입양 당시 4개월, 현재 43살, 네덜란드)
한때 진실이라 믿었던 입양 정보는 상당수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국제입양 보내고 아버지와 언니들에게 제가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음을 나중에서야 알았으니까요. 제가 남자아이였어도 입양되었을까요? 언니들과 저는 오랫동안 엄마에게 화를 품고 살았습니다.
친부모와 첫 상봉 이후 지난 15년간 그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 특히 우리 가족의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친부모는 극심한 가난 때문에 이런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습니다. 육아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서양 가정에 아이를 팔면 오히려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모든 친부모와 입양인은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 자격이 있습니다. 그걸 위하여 우리의 진정한 역사를 아는 것은 권리입니다.
입양트라우마 일생 영향…나를 찾을 정보 어디에
마거릿 콘론(입양 당시 4살, 현재 62살, 미국)
입양 트라우마는 자아 정체성, 인간관계, 경력, 모성애 등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린 시절 내내 인종차별적 말과 행동으로 고통받았습니다. 양부모한테서 정서적 학대를 경험했고요. 사랑은 제가 착한 크리스천 소녀처럼 행동할 때만 주어졌습니다.
페이스북 그룹 ‘한국계 미국인 입양인’(KAA)을 통해 진실화해위원회에 관한 정보를 처음 접했을 때 흥미를 느꼈습니다. 1965년 홀트를 통해 미국 가정으로 입양된 저의 이야기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아로 버려진 게 아니라 친엄마가 직접 입양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면 제 자아인식이 뒤집어질 수 있습니다. 몇년 전, 생모를 찾으려고 할 때 다른 입양인들처럼, 제 파일에 출생 조회를 할 수 있는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또 거짓말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1년동안 낱낱이 살핀 서류, 실수·기억 오류라 볼수 없어
니아 경자 리 코 토프타게르(입양 당시 3살 또는 4살, 현재 52살 추정, 덴마크)
덴마크 이름과 한국 이름을 섞어 19살 때부터 사용해 왔습니다. 1968년생으로 추정됩니다. 뇌성마비로 태어났다고도 하지만 불확실합니다. 서류엔 1971년 12월13일 입양되었다고 나옵니다. 하지만 양부모는 제가 1972년 9월22일 도착했고 그해 덴마크 시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팬데믹 이후 세상이 열리던 2022년, 입양 사례를 조사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는 한 친구를 페이스북에서 만났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입양 서류들을 하나하나 읽고 해독하게 된 계기입니다. 입양 절차를 한 번에 한 날짜씩 단계별로 추적할 수 있도록 ‘타임라인’ 세션을 주최하기도 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 개시를 결정했을 때 희망이 생겼습니다. 지난 1년간 제가 본 모든 입양 사건에서 잘못되고 위조된 정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입양 서류를 다시 살펴보니… 흠… 단순히 실수이거나 누군가가 잊어버린 것일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입양 역사의 이 장을 소화하고 화해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입양인 부부의 잃은 가족사, 아이들한테 찾아주고 싶어
에리카 블리크만(입양 당시 4개월 반, 현재 47살, 네덜란드)
한국 이름은 서준희. 한국사회봉사회의 사회복지사가 지어준 이름일 겁니다.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된 본적은 리춘(이천으로 추정)입니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저는 1975년 9월1일 새벽 1시15분경 부산시 서구 암남동 산7번지의 소년보호시설 앞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신고는 서부경찰서에 접수되었습니다. 당시 만 2살 정도, 발견자는 왕황현(24살). 제보자는 지프차(번호판: 부산1가5556)를 운전했는데, 기자 2명과 함께 운전 중 아기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후 남광임시보호소에서 지내다가 국군수도병원으로 갔습니다.
1976년 1월24일 네덜란드에 도착했습니다. 농부 부부가 시골에서 저를 키웠습니다. 두 형제와 함께 자랐고 막내도 한국에서 입양됐습니다. 현재 로테르담의 극단에서 일하며 8살인 쌍둥이 딸을 키웁니다. 남편도 한국에서 입양됐는데 본인 가족사를 모른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부부에게는 없는 가족사를 아이들에게는 꼭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사는 우리 것이 아니라 입양 기관의 것입니다. 입양인들이 더 나은 입양 후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기획 공동진행 한분영(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그룹 공동설립자), 번역감수 김지은(April)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곽진산 기자
kj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