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숙성을 지연시켜 썩지 않게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농산물 신선도 유지기를 판매하면서 부작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제조업자는 농부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지난 18일 농산물 신선도 유지기를 이용하고 사과가 갈변하자 제조 및 판매한 ㄱ씨에 대해 사과 농부 ㄴ씨가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원심이 ㄱ씨의 고지의무 위반에 관한 법리를 오해했다”며 사건을 대구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31일 밝혔다.
ㄴ씨는 2019년 10월 ㄱ씨로부터 ‘싱싱솔루션’이라는 플라즈마 발생장치를 300만원에 샀다. 플라즈마 발생장치란 과일의 숙성을 촉진하는 에틸렌 가스를 분해하고 곰팡이나 세균을 제거하는 플라즈마를 방출하는 기구로, 농산물의 부패와 변질을 막고 숙성을 지연시켜 농산물의 저장 기간을 늘리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ㄴ씨는 이 장치를 저온 창고에 설치하고, 수확한 사과 1962상자, 11만3813개를 보관했다. 그런데 2020년 1월6일 일부 사과에 갈변 및 함몰 증상이 나타났다.
사과연구소 검 사결과 이 증상은 플라즈마 발생 장치와 관련이 있었다. 플라즈마를 생성하는 과정에서 오존이 함께 왔는데 밀폐된 창고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면서 사과 갈변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ㄴ씨는 ㄱ씨가 장치 부작용과 사용 시 주의사항을 고지할 의무를 위반했다며 8078만원을 지급하라고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2심 판단이 달랐다. 1심은 “장치 사용설명서에는 구체적인 작동방법이 없다”며 “고지 의무 위반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2심은 “오존 노출이 심각한 피해를 일으킨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상식”이라며 “설명서에 잘못된 시간 설정으로 농작물에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기재돼 있어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까지 예상해 설명할 의무가”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ㄱ씨가 애초 장치 가동 시간 설정을 잘못한 과실이 있다며 일부 책임을 인정했다.
대법원은 2심에 법리 오해가 있다고 파기환송했다. ㄱ씨가 장치 사용설명서에 농작물 피해 가능성을 적어두지 않은 점을 근거로 고지 의무 위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는 ‘제조물 책임법’상 ‘표시상의 결함’으로도 볼 수 있다”며 파기환송심이 다시 심리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오연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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