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경영권 승계 과정을 둘러싼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2020년 6월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서울지검 소속 부장급 이하 검사 100여명은 긴급 검사회의를 갖고 ‘현행 구속 전 피의자 심문 제도(영장실질심사제)의 폐지 건의문을 제출했다. 검사들은 건의문에서 ‘검사가 청구한 영장을 임의로 기각하는 등 법원의 시행착오로 인해 형사절차상 피해자가 소외되고 범죄인 천국이 돼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앙일보> 1997년 11월18일치)
구속 여부를 판단하기 전 판사가 피의자를 불러 소명할 기회를 주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은 현재 너무도 당연한 절차·권리로 여겨지지만, 28년 전 만해도 판사는 검사가 제출한 서류만 검토해 피의자의 구속 여부를 결정했다. 국민의 기본권 침해를 막기 위해 1995년 구속 전 피의자심문이 도입될 당시 수사기관들은 “수사의 기밀이 유지될 수 없다” “수사력 분산·약화 우려가 있다” “실체적 진실 발견이 어려워진다” 등의 이유로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제도 도입을 반대했던 수사기관의 논리는 2023년 ‘압수수색 사전심문 제도’ 도입을 반대하는 논리와 판박이다. 법원행정처는 지난 2월 휴대전화 등의 무분별한 압수수색을 막기 위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하기 전 법관이 대면심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압수수색 사전심문제’가 포함된 형사소송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상황이다.
■ 피의자심문 도입 후 구속자 14만→2만
검찰이 청구한 영장을 판사가 발부하는 ‘영장주의’는 1948년 미군정 법령 제176호를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와 제헌헌법과 1954년 형사소송법에 포함됐지만, 오랫동안 판사는 검사가 송부한 서류만을 심사해 구속 여부를 결정해왔다. 그 결과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는 과다했고, 국민의 기본권은 지나치게 침해됐다. 반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이 도입되자 우려와 달리 긍정적인 효과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피의자가 판사에게 직접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수 있게 되면서, 형사 사법에 대한 국민 신뢰가 높아졌다. 무죄 추정의 원칙과 불구속 재판이 자리 잡고, 검찰 수사에 대한 간접 통제 효과도 나타났다. 검찰통계시스템을 보면, 구속영장 청구 사건은 1997년 14만3591건에서 2022년 2만2588건으로, 전체 사건 대비 구속 비율(구속점유율)은 5.4%에서 1.2%로 급감했다.
2004년 8월5일 오후 독일로 출국하는 송두율 교수와 정정희씨 부부가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배웅나온 지인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 외에도 검찰은 피의자가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을 때 변호인의 도움을 받는 것 역시 오랫동안 반대해왔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수사기관의 인권 침해를 지켜본 학계와 인권단체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변호인 참여 보장’을 요구했지만, 수사기관은 수사기밀 유출 및 관련자 회유·증거 은닉 가능성 등을 이유로 강하게 반대했다. 검찰은 변호인이 관련자들의 진술을 언론에 유출함으로써 수사·재판에 부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도 폈다.
하지만 역사는 2003년 바뀌었다. 허가 없이 방북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된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의 변호인단은, 변호인 참여를 허용하지 않은 검찰의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준항고를 청구했다. 2003년 10월31일 서울지법 형사32단독 전우진 판사는 “피의자 신문 과정에 변호인 참여권은 헌법상 규정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에 포함된다”며 “변호인 참여권 여부에 대한 법률이 없는 상태에서 참여권을 제한하는 것은 위법하다”고 결정했다. 검찰은 즉시항고 했지만, 대법원은 같은 해 11월11일 이를 기각했다. 당시 대법원은 “구금된 피의자는 피의자 신문을 받음에 있어 변호인의 참여를 요구할 수 있고 그러한 경우 수사기관은 이를 거절할 수 없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검찰의 완패였다. 그 결과 2007년 형사소송법 개정을 통해 피의자 신문에서의 변호인 참여권(제243조의2)이 신설됐다.
개정 형사소송법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영상녹화조사실에서 2008년 1월23일 오후 검찰 관계자들이 조사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과정을 시연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사회 변화 맞춰 형사소송제도 바꿔야
법조인들은 사회 변화에 맞춰 형사소송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압수수색 사전심문 제도 역시 최근 휴대전화 단말기 압수수색이 늘면서 사생활 침해가 과도하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적극 논의되기 시작했다. “휴대전화를 압수당하면 집을 통째 내주는 것과 같다”는 문제 제기 등이 나오는 상황에서, 대면 심문을 통해 압수수색 영장 발부를 엄밀히 검토하겠다는 취지다.
홍기태 변호사는 “판사의 대면심문, 변호인 참여권 보장 등을 수사기관이 반대하는 이유는 견제나 제한이 생기면 수사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인권 의식이 높아진 데다 예전에 없던 새로운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고법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수사기관은 늘 ‘범죄가 창궐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지만, 결과적으론 국민이 혜택을 입었다”며 “과거 형사소송법이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많이 생겨나는 지금,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은주 오연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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