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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뉴스AS] ‘제2의 엘리엇’ 온다…손해액 외에 정부 주장 다 깨져

등록 2023-06-26 15:20수정 2023-06-27 02:46

삼성물산과 엘리엇. 연합뉴스
삼성물산과 엘리엇. 연합뉴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ISDS)에서 한국 정부가 법률비용을 포함해 약 1300억원을 배상하게 됐다. 중재 판정부가 2015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국민연금공단(국민연금)이 찬성하도록 부당하게 개입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ISDS는 해외 투자자가 피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로 피해를 봤을 때 국제 중재로 손해배상을 받도록 하는 제도다. 중재 판정부는 한국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규정된 ‘최소대우기준’을 위반해 엘리엇에 손해를 입혔다고 했다. 지난 5년간 ISDS에서 엘리엇과 한국 정부가 다툰 주요 쟁점과 중재 판정부의 결론을 짚어본다 .

■ 발단 :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그룹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병하겠다고 발표했다. 합병비율은 ‘0.35대1’이었다. 제일모직의 기업가치가 삼성물산보다 3배가량 높다는 의미다. 삼성물산 주주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두 기업의 자산총액을 비교해보면,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대신 제일모직 주가는 삼성물산보다 3배 정도 높았다. 자본시장법은 주식가치를 기준으로 기업가치를 평가하게 돼 있다.

엘리엇이 등장했다. 2015년 6월4일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 7.12%(1100만여주)가 있다며 합병에 반대했다. 합병 조건이 삼성물산에 공정하지 않아 주주 이익을 해친다는 이유에서다. ‘위임장 대결’을 벌이며 엘리엇과 삼성물산은 팽팽히 맞섰는데, 삼성물산의 최대주주(9.92%)인 국민연금이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으로 보였다. 국민연금은 2015년 7월10일 공단 내부기구인 투자위원회를 열어 합병 찬성 결정을 내렸다.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임시총회에서 합병이 가결됐다. 삼성물산 주총에서 합병에 찬성한 비율은 69.53%였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쟁점 ①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은 국가의 행위인가

ISDS는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다. ‘국가의 행위’가 존재해야 한다. 한미 FTA는 국가의 행위를 “국가가 채택하거나 유지하는 조치”라고 규정한다.

엘리엇이 주장하는 ‘국가의 행위’는 이렇다. ①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대가로 청와대 비서관들과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②청와대와 보건복지부가 압박하자 국민연금 홍완선 당시 기금운영본부장은 찬성 표결이 어려워 보이는 독립된 전문위원회가 아닌, 국민연금 내부 투자위원회에서 결정하겠다고 보고했다. ③합병 찬성 쪽으로 유도하기 위해 홍 본부장은 일부 투자위원들과 접촉하고 리서치팀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시너지 효과를 급조하도록 지시했다. ④국민연금 투자위원회는 조작된 허위 정보를 토대로 합병 찬성을 결정하고 국민연금은 합병에 찬성하는 의결권을 행사했다. ⑤한국 정부 관료들과 삼성 임원들은 이러한 위법 행위로 형사상 유죄판결을 받았다. 다시 말해 엘리엇은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의 재판·판결에서 드러난 박근혜∙문형표∙홍완선 등 개인들의 행위가 국가의 행위이며, 국민연금은 ‘국가기관’이라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정부 관계자가 비위를 저질렀다고 해도 이를 국가의 행위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미 FTA상 국가의 채택·유치 조처는 ‘국가 주권 차원의 권한이 특정한 형식(법률이나 행정적 규칙의 제정 등)을 통해 행사되는 경우’로 좁게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일종의 보험사인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순수한 ‘상업적 행위’에 불과하기에 이를 국가의 행위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맞섰다.

중재 판정부는 정부 관계자 등이 국민연금의 합병 표결에 개입한 행위는 물론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도 국가의 행위라고 봤다. 국민연금은 법률상 국가기관은 아니지만 ‘국민연금기금’을 관리·운용하면서 한국 정부와 기능·재정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데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서 복지부의 지침과 지시에 따랐기에 ‘사실상의 국가기관’이라고 했다.

■ 쟁점 ② 한-미 FTA 최소기준대우 위반인가

엘리엇은 한국 정부가 한미 FTA에 규정된 최소대우기준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국제관습법상 외국인에게 인정되는 △공정·공평한 대우와 △충분한 보호·안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이러한 행위를 말한다.

피투자국이 해외 투자자에게 명확한 자의성, 노골적인 불공정성, 적법절차의 완전한 결여, 명백한 차별성 또는 근거의 명백한 결여를 포함하는 ‘상당히 터무니없고 충격적인’ 행위를 범하는 경우가 바로 최소대우기준 위반이다.

엘리엇은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의 재판·판결을 근거로 ‘상당히 터무니없고 충격적인’ 행위가 3단계에 걸쳐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1단계는 정부 고위관계자들이 국민연금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찬성을 지시한 것이다. 2단계는 청와대와 보건복지부가 합병 표결을 투자위원회가 하도록, 그 투자위원회가 합병을 승인하도록 국민연금에 지시했다. 3단계는 국민연금이 대통령과 보건복지부의 위법한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시너지’ 보고서 등을 급조해 투자위원회에 보고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국민연금이 외부 압박 없이도 자체적으로 삼성물산-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할 수 있었다고 반박한다. 국민연금 투자위원회는 합병을 찬성하라고 정부로부터 뇌물을 받거나 위협당하지 않았고,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외에도 삼성 계열 상장사 17곳에 투자하고 있었기에 합병이 실패할 경우 다른 삼성 계열사의 주가가 크게 떨어질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기적 수익성을 고려한 투자위원회가 독립적으로 합병 찬성에 표결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게 한국 정부의 주장이다. 또 11%의 주식을 보유한 국민연금의 의결권만으로 합병이 의결됐거나 이 때문에 엘리엇이 손실을 입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도 반박했다.

중재 판정부는 한국 정부가 한미 FTA상 최소기준대우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하며 엘리엇의 손을 들어줬다. 또 국민연금이 사실상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어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 표결과 삼성물산 주주들의 손실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봤다.

■ 쟁점 ③ 손해액은 어떻게 산정하는가

2018년 엘리엇은 한국 정부에 ISDS를 청구하면서 7억7천억달러를 배상해달라고 요구했다. 엘리엇의 삼성물산 주식은 모두 1100만여주였는데, 6858억원으로 사들여서 5818억원에 팔았다. 손해는 1040억원 정도다.

그러나 엘리엇은 ‘매도가격-매수가격’을 손해로 계산하지 않고, 2015년 당시 보유했던 삼성물산 주식 1100만여주의 ‘내재가치’를 내세웠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부결됐다면 실현되었을 것으로 예상하는 주식의 가치(내재가치)에서 매도가격을 빼는 방식으로 손해를 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최초 청구액은 7억7천달러, 최종 청구액은 4억825억달러였다.

한국 정부는 실제 삼성물산 주가를 기준으로 손해를 산정해야 한다고 맞섰다. 특히 엘리엇은 삼성물산 주식에 투자해 손실을 보았지만 스와프에 따른 거래로 이익을 얻었다며 실제로 손실은 없다고 강조했다. 엘리엇은 2014년 11월 처음 매입한 이후 삼성물산 주식을 수없이 사고팔며 투자 형태도 바꾸었는데, 그때 이미 수익을 많이 올렸다는 것이다.

또 한국 정부는 엘리엇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따라 분쟁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투자했다고도 주장했다. 2015년 5월26일 합병 발표 이후에 오히려 삼성물산 주식에 대한 직접 소유분을 크게 늘렸다는 점을 그 근거로 내세웠다. ‘큰 손실을 보게 됐다’고 주장하면서도 삼성물산 주식을 더 매입했으니 ISDS를 미리 계획한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엘리엇은 ‘순수한 투자’였다고 맞선다. 특히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설이 돌았지만 2015년 초 삼성과 국민연금 관계자들과 직접 소통했기에 합병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2015년 3월18일 국민연금 대리인은 삼성물산-제일모직의 합병은 삼성물산 주주에게 매우 큰 손해라고 동의했고, 2015년 4월9일 삼성물산 경영진은 합병을 진행할 의도도, 고려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고 엘리엇은 주장한다.

중재 판정부는 엘리엇이 순수한 투자로 손실을 보았다고 인정하는 대신 그 손해액 산정은 한국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삼성물산 주가를 기준으로 손해액을 5359만달러(약 690억원)로 정했다. 지연이자를 포함하면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1천억원을 배상해야 한다. 엘리엇이 쓴 일부 법률비용(2890만달러·372억5천만원)도 부담하도록 했다.

■ ‘산 넘어 산’…제2의 엘리엇이 온다

론스타 ISDS의 경우 1976년 발효된 한-벨기에 투자보장협정에 기반을 뒀지만, 이번 엘리엇 사건은 비교적 최근 발효된 한미 FTA를 바탕으로 한다. 2018년 한미 FTA 재협상 때도 시민사회와 법조계에서는 ISDS에 대한 위험성 지적이 거셌지만, 정부가 이를 무시해 막대한 배상 책임을 자처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메이슨 사건은 엘리엇 사건과 사실관계와 쟁점 등 소송 개요가 일치하는 닮은꼴 사건이라 결론 역시 비슷할 것으로 예상한다. 메이슨은 한국 정부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최소 1억7500만 달러(2200억원) 손해를 봤다며 엘리엇과 나란히 ISDS를 밟고 있다. 2022년 5월 최종 구두변론까지 마무리됐고 판정만 남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통상위원회에서 활동해온 노주희 변호사는 “메이슨 사건은 엘리엇 사건과 다른 중재 판정부가 맡고 있지만 이번 판정이 메이슨 쪽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사실”이라며 “엘리엇과 메이슨 외에도 삼성물산의 다른 외국인 주주들이 ISDS를 밟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참고 문헌 : <ISDS 넌 누구냐>(2021), 엘리엇 vs 대한민국 ISDS 서면자료: 청구인 심리 후 주장서면(2022.4.13), 피청구국의 심리 후 주장서면(2022.4.13), 청구인 심리 후 답변서면(2022.5.18), 피청구국의 심리 후 재반박서면(2022.5.18), 법무부 보도자료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 판정 선고’(202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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