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잘 주무셨어요? 우리 아기 새뮤얼(가명)도 잘 잤죠?”
경쾌하게 인사를 나누며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병실에는 다른 신생아중환자실과 달리 하얀 철재로 만든 커다란 아기 침대에 백일이 지나 7㎏은 족히 넘어 보이는 새뮤얼이 누워 있었다. 아기 볼은 잘 익은 사과처럼 싱그럽고 빨갛게 빛났다. 환한 햇빛이 병실 안을 쨍하게 비추며 부자가 서로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니 온 방이 훈훈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아빠 스미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응시했다.
“새뮤얼이 지금 경련 중이에요.”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말에 슬픔의 향이 진하게 뿜어져 나왔다.
■ 치료 그다지 의미 없는 유아성 경련
새뮤얼은 ‘유아성 경련’이라는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다. 태어난 지 12개월 전후인 아기가 뇌전증을 앓으면 이런 병명이 붙는다. 팔다리가 양쪽 모두 고르게 굳어지면서 짧게 움찔대는 움직임이 특징이다. 1만 명 중 한두 명만 걸리는 드문 병으로 보통 유전질환이 요인이다.
그렇지만 어떤 연유로든 뇌가 다치면 발병하기도 한다. 경과는 치명적이다. 죽을 확률도 높지만, 살아남더라도 뇌가 제 기능을 할 확률이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여러 치료법(스테로이드, 항경련제, 저당식단 등)으로 완치도 가능하지만 대부분 심각한 발달 지연과 퇴행, 뇌전증을 동반한다.
새뮤얼의 몸에 손을 가만히 얹었다. 아빠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고 착각할 만큼 새뮤얼은 아빠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새뮤얼의 뇌에서는 짧고 강력한 뇌파가 계속 일어나 팔과 다리가 굳어지고, 움찔거리고, 또 한곳을 응시했다. 아빠는 멍하니 바라보는 새뮤얼과 눈을 맞추려 애썼다. 나를 바라볼 수 없는 내 아이의 눈빛을 참아내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아이의 눈이 나를 담아도 인지할 수 없다니…. 계속 움찔거리는 아기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부모 마음은 얼마나 참담할까.
아기가 발작 증세를 보이면 주저하지 않고 치료에 임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러나 유아성 경련 환자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사실, 경련을 보이는 아기에게 치료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약을 투여해도 움직임은 잠시 멈출 뿐이다. 경련은 아기의 한 부분이나 마찬가지여서 지금 멈추더라도 다시 돌아온다. 반창고 같은 임시방편의 치료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고요한 병실 안은 침묵이 묵직하게 이어졌다. 스미스와 나는 아이의 머리에 팔에 다리에 또 배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새뮤얼,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빨리 나아서 아빠와 엄마의 사랑에 웃는 날이 오면 좋겠어.’ 가슴에서 쏟아진 말이 내 손을 타고 새뮤얼의 머리까지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 작은 침대에 웅크려 아이를 감싸고서
스미스 부부는 며칠 전 신경과 상담을 받은 뒤 눈물 흘리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눈물 닦을 화장지를 건네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누구라도 이런 병명과 경과를 듣는다면, 그리고 그에 따른 미래를 상상한다면, 암담한 마음에 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미스 부부는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새뮤얼 곁을 지켰다.
테스트가 필요해 아기 등에 바늘을 넣어 척수액을 뽑아야 했다. 병실에 가니 새뮤얼은 엄마 품에 꼭 안겨 있었다.
“오늘은 새뮤얼을 꼭 안아주고 싶어요. 가능하면 온종일 제가 안고 있을래요.”
간절해 보이는 엄마의 눈빛을 앞에 두고 차마 안 된다고 할 수 없어 테스트를 미루겠다고 했다. 잠시나마 엄마 얼굴에 안도의 핑크빛이 돌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이나 내일모레 해도 치료나 진단에 큰 무리가 없을 거예요.”
주저하는 부모를 안심시키고 병실을 나섰다. 닫힌 문 뒤로 흐느낌이 멈추지 않았다. 복도 창밖으로 햇살이 부서져 조각조각 들어왔다. 성큼 들어온 햇살이 새뮤얼의 미래에 희망이 돼줄지, 그 햇살만큼 새뮤얼의 시간도 사라지는지 알 수 없었다. 햇살 한 조각에 내 희망과 다른 한 조각에 새뮤얼의 보이지 않는 꿈과 미래를 달아 띄워 보냈다. 저 하늘 위로는 기묘하게도 회색빛 구름과 새하얀 구름이
서로의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마치 우리의 슬픔이 증발해 먹구름이 된 것처럼.
새뮤얼의 경련이 한참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다른 응급 상황에 호출돼 잠시 새뮤얼과 가족 곁을 떠났다. 다시 돌아오니 신생아중환자실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긴 경련을 보다 못한 엄마가 새뮤얼의 작은 침대에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누워 아이를 뒤에서 꼭 안고 있었다. 세상 모진 풍파 다 내가 막아줄 테니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엄마의 뒷모습이었다. 아픔이 그의 등을 타고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치료약, 이제 그만 줄까요?”
치료하고 싶은, 이타심을 가장한 이기심의 말이 나오려다 들썩이는 엄마의 어깨 속도만큼 빠르게 들어갔다. 새뮤얼은 계속 경직되는 다리와 움찔대는 팔을 휘저으며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우는 듯했다. 엄마는 그 고독한 싸움을 옆에서 지키며 가만히 안아주고 있었다. 황제펭귄이 몇 달을 쉬지 않고 알을 품는 것처럼. 혹독한 남극 기온을 버텨내며 정성으로 키우지만 부화 성공률은 높지 않다. 아름다운 엄마의 뒷모습에 무력함이 더해져 아픔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누구도 보지 않으면 좋았을, 어떤 엄마도 겪지 않으면 좋았을 뒷모습이었다.
스텔라 황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병원 소아과 신생아분과 교수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손바닥만 한 초미숙아부터 만삭아까지 돌보는 스텔라 황 교수가 어린 생명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스텔라 황 교수는 의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3주마다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