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9일 서울 서초구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열린 ‘성·본 변경청구’ 허가 환영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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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박씨’는 수백만명이에요.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대를 이어가요. ‘양주 박씨’의 시조인 우리 아내의 대는 누가 잇나요?”
아들의 성·본을 베트남 이주민 출신인 자신의 것으로 바꿔달라고 법원에 요청한 박화연(29)씨의 한국인 남편 박규정(63)씨는 청구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혼인 관계 중에, 그것도 자녀의 성·본을 이주여성인 ‘엄마’ 것으로 바꾼 사례는 매우 드물다. 현행 민법상 사람은 태어나면 아빠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게 원칙이기 때문이다. 2005년 호주제 폐지 뒤 민법이 바뀌면서, 부모가 혼인신고를 할 때 엄마의 성·본을 따르기로 협의하면 엄마의 성·본을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애당초 아빠의 성과 본을 따랐다면 중간에 변경하기 매우 어렵다. 법원은 부부의 이혼·사별하는 등 제한적인 경우에만 ‘자녀의 복리를 위한 필요성’을 따져 성·본 변경을 허가한다.
베트남 하노이대학을 다니던 베트남인 화연씨는 지난 2016년 베트남 여행을 온 규정씨를 만나 1년 뒤 결혼했다. 경기 양주시에 가정을 꾸리며 2018년 1월 아들을 낳았다. 지난 2021년 화연씨는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한국 이름으로 개명한 뒤 본관을 ‘양주’로 정했다. 귀화한 외국인이 한국식 이름으로 개명할 때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으면 법원은 ‘성과 본’을 새로 만드는 걸 허가한다. 부부는 코로나19로 왕래가 어려웠을 때를 제외하면 겨울마다 베트남에서 몇달씩 지냈다. 아이가 베트남어를 빨리 익힐 수 있도록 베트남 현지 유치원에도 보냈다.
지난 2월 규정씨는 아내에게 아들의 성·본을 바꾸자고 먼저 제안했다. 그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아내는 훌륭한 사람이고, 저는 늘 아내를 존경한다”며 “한국에 와서 정착한 아내의 ‘양주 박씨’의 대가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화연씨도 아들에게 베트남인의 뿌리를 물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성·본 변경 신청에 동의했다.
부부는 법원에 가서야
이주여성의 자녀가 엄마의 성·본으로 변경을 허가받은 전례가 없다는 걸 알았다. 아내가 창성·창본을 할 때도 어렵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법원 창구에서 서류를 준비하는 것부터 막혔다. 창구 법원 직원이나 법률 상담 변호사도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우왕좌왕했다. “허가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들 했다. 함께 간 아들을 보여주며 규정씨는 말했다.
“이렇게 예쁜 아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건 아내 덕분입니다. 무엇보다 나이가 많은 저와 타국에서 결혼하겠다고 나선 사람도 아내입니다. 자신의 성·본을 아들이 따르도록 하는 것은 엄마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규정씨는 성·본 변경 허가 청구서에 “아들이 엄마의 성·본을 따름으로써 베트남 이주민의 한국인 후손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갖게 하고 싶다. 다문화 가정에 대한 편견도 이겨내고 싶다”고 적었다.
지난 16일 의정부지법 가사1단독 이의진 판사는 박씨의 청구를 받아들였다. 법원이 이례적으로 이 부부의 청구를 받아들인 이유는 부성우선주의보다는 아들이 베트남 엄마의 정체성을 이어감으로써 긍지와 자부심을 얻는 것이 더 큰 이익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 판사는 결정문에서 “아들의 성·본 변경이 가족 사이의 정서적 통합에 도움이 되고, 가족 구성원의 개인적 존엄과 양성평등이라는 헌법상 이익에 부합하다”고 밝혔다. 법원의 결정으로 아들의 성은 ‘밀양 박씨’에서 엄마 성·본을 따라 ‘양주 박씨’로 바뀌었다.
이 판사는 허가 결정을 하면서 아들이 겪을 수도 있는 차별을 걱정했다고 한다. 아빠의 성·본을 따르는 게 오랜 관습인 한국 사회에서 엄마의 성·본을 따른 자녀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시선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이 판사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아빠 성·본을 따르지 않는 아이들에 대한 사회의 이상한 호기심과 편견이 부성우선주의를 완화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판사는 “성·본 변경으로 인해 대외적으로 외국 이주민의 혈통임을 드러내고 또 사회의 주류 질서라고 할 부성주의에 반하는 외양이 형성돼 비우호적인 호기심과 편견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우리 사회가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밝혔다.
여성계에선 법원의 결정을 환영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본 제도가 폐지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호주제 폐지 운동을 했던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조경애 법률구조1부장은 “법원 결정은 아버지의 본관을 따라야 한다는 기존 부성 우선주의를 흔든 것으로 아버지와 성·본이 같아야 사회 주류로 보는 편견을 깼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일상생활에서 본이 갖는 의미는 거의 없다. 부계 혈통 중심의 가족 의식을 유지하는 것일 뿐이다. 가족관계등록부에 본이 표시되는 것 자체가 시대 흐름에 역행한다”고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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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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