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산업재해 승인 신청자가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새벽과 주말에도 회사 이메일이 쉼 없이 왔어요. 어느 날부터 식은땀이 나고 숨이 안 쉬어지면서 ‘이렇게 죽겠구나’ 싶었죠.”
지난 2018년 외국계 회사로 직장을 옮긴 50대 ㄱ씨는 수습 기간 일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업무 지시는 밤낮 없이 쏟아졌다. 과도한 영업 할당을 채워야 한다는 사내 분위기가 ㄱ씨를 압박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영업 현장에 곧바로 투입됐다. 그는 출근 한 달이 지나도록 업무용 노트북도 받지 못했다. 회사에 적응하기 어려운 탓에 항상 긴장 상태였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결국 ㄱ씨는 출근한 지 3개월 만에 ‘급성 스트레스 반응’과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국내 대기업 등 20년 이상 동종 업계에서 일했지만, 의료기관에서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병가를 요청했지만, 회사는 퇴사를 권유했다. 병가 5일과 연차 3일을 쓰고 복귀한 날, ㄱ씨는 이메일로 ‘계약 종료’ 통지서를 받았다. ‘수습 기간 저조한 업무 성과로 인해 계약을 종료한다’는 내용이었다.
ㄱ씨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를 찾았다. 노동위원회는 “해고의 정당한 사유가 인정된다”고 했다. 그러나 ㄱ씨가 해고된 뒤 근로복지공단은 ㄱ씨의 정신질환 가운데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대해 ‘업무상 질병’이라며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ㄱ씨는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정당한 해고’ 판단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회사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요양승인처분 취소소송을 냈다. 법원은 ㄱ씨와 근로복지공단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승소에도 불구하고 ㄱ씨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ㄱ씨와 중노위 간 소송에 보조참가인 자격으로 관여한 회사가 ㄱ씨의 ‘정신질환 진료기록’을 모두 입수했기 때문이다. ㄱ씨는 “(정신과) 진료기록이 모두 공개됐으니 업계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건 아닐지, 불안하고 벌거벗겨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ㄱ씨를 대리한 임자운 변호사는 “정신질환 피해를 주고 부당해고까지 했던 회사가 진료기록 전체를 들여다보는 건 ㄱ씨의 인격권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를 법원에 수차례 전달했지만 거부당했다”고 말했다. 판사 출신 변호사도 “정신질환 진료기록은 개인정보 중에서도 가장 민감해 기간을 특정해 제출하도록 하는 게 통상적인데 진료기록 전부 제출 요구를 법원이 받아들인 건 이례적”이라고 했다. 회사 쪽 대리를 맡은 김앤장 법률사무소는 “고객 관련 사안이라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고 답했다.
권지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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