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가 엘리엇에 690억원(법률 비용 제외)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분쟁(ISDS) 판정에 대한 불복(취소 소송) 시한을 불과 일주일(18일) 남겨두고서도 여전히 입장을 정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론스타 사건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다. 당시 한동훈 장관은 중재 재판부 판정이 나온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취소 신청 등 후속조치에 나서겠다고 밝힌 바 있다.
법무부는 10일 엘리엇 소송에 대한 정부 대응을 묻는 <한겨레> 질의에 “(취소 소송 제기 여부를) 면밀히 검토 중”이라고만 밝혔다. 법무부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는 불복 여부를 결정할 윤석열 대통령과 한 장관이 엘리엇 쪽에 소송 근거와 논리를 제공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엘리엇 주장과 중재판정부 판단의 근거는 윤 대통령과 한 장관이 검찰에 재직하던 때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을 수사·기소한 내용과 사실상 일치한다. 윤 대통령이 수사에 참여했던 국정농단 특검은 이 부회장 등을 경영권 승계 협조 등의 대가로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기소해 유죄 판결을 끌어냈다. 또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이던 2020년 9월 검찰은 이 부회장 등 삼성 관계자 11명을 기소하면서 “(이 부회장 등이) 허위의 합병 정당화 논리를 바탕으로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의 찬성 의결권을 확보하기로 계획한 다음 조작된 합병 비율 검토보고서 등을 국민연금에 제공”했고 “(박근혜 대통령 등이) 합병 성사를 위해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유도했다”고 밝혔다. 한 장관은 서울중앙지검 3차장으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형사부장으로 이 사건 수사에 참여했다.
엘리엇은 검찰이 규명한 박근혜 정부의 이런 ‘관치’를 끈질기게 문제 삼아 배상 판정을 받아냈다. 실제 당시 수사팀도 엘리엇이 제기한 소송에 정부가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현 정부 핵심 인사가 된 이들은 당시와 정반대 논리를 펼쳐야 하는 ‘자기모순’에 처하게 된 것이다. 송기호 변호사는 “정부가 취소 소송을 제기할 경우 국민연금이 국가기관이 아니라는 주장을 해야 하는데 윤 대통령과 한 장관의 검사 시절 주장한 법리와 모순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10월27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회계부정·부당합병’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한 뒤 나와 승진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정부 결정을 앞두고 삼성의 움직임도 분주해지고 있다. 삼성물산과 엘리엇이 2016년 비밀협약을 맺고 2022년 724억원(세금 포함)을 지급했다는 사실이 새로 드러나면서 이 회장의 ‘경영권 불법 승계’ 혐의에 대한 1심 재판에 변수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자본시장법(부정거래·시세조종), 외부감사법 위반,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3년째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은 지난 7일 재판에서 삼성과 엘리엇의 비밀합의를 언급하며 “삼성 스스로 합병 비율이 정당한 비율과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 것으로 특혜”라고 주장했다. 반면 이 회장 변호인 쪽은 “주식 매수 가격 등 ‘비공개 약정’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재판부는 쟁점이 더 생겼다며 중재판정문을 확보해 양쪽이 공방을 펼칠 것을 요청했다. 애초 재판부는 지난달 10∼11월께 변론을 종결할 계획이라고 밝혀 이르면 올해 안에 1심 판결이 나올 전망이었다. 복수의 변호사는 <한겨레>에 “최근 삼성 쪽에서 엘리엇 판정 취소 소송 제기 절차를 문의해 왔다”며 “정부가 취소 소송을 제기하면 이 회장 변호인 쪽이 재판에서 유리한 근거로 활용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엘리엇 판정이 확정되면 1300억원에 이르는 배상액을 국민 세금으로 감당해야 하는 만큼 이 회장 등을 대상으로 구상권을 행사하라는 요구가 커질 전망이다. 2020년 이 회장을 기소한 검찰 역시 정부가 엘리엇 소송에서 패소할 경우 이 회장은 물론 불법 행위에 가담한 삼성 관계자들에게 구상권 청구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김남근 변호사(참여연대 정책자문위원장)는 “이재용 회장은 뇌물제공 혐의가 법원에서 이미 인정됐고, 향후 재판에서 삼성 임직원들의 책임 소재가 드러나면 구상권 청구 대상도 명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훈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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