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병인 웨스트증후군을 앓고 있는 민준이가 간식을 먹고 있다. 위루관을 뗀 민준이는 밥과 죽 사이의 후기 이유식 정도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밥솥이 있어야 할 자리엔 즉석밥 4개가 있었다. 국물 자국 하나 없는 가스레인지 옆엔 시리얼과 라면이 가득 쌓여 있었다. 식기 건조대에는 라면 냄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동안 제자리였을 것 같은 일렬로 세워진 식기들 속 무늬가 많이 벗겨진 실리콘 수저 8개만이 사용감을 드러냈다.
수저의 주인은 2017년생 6살 민준(가명)이. 지난달 25일 경기도 용인의 한 임대주택에서 만난 민준이는 희귀 질환인 웨스트 증후군을 안고 태어났다. 경련성 질환인 웨스트 증후군은 뇌를 자극하는 호르몬이 과다분비돼 하루 수백번의 발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직 정확한 인과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 치료가 지연되면 다른 장애로도 이어지는데 민준이가 이 경우다.
일찍이 세상에 나오느라 제왕절개로 민준이를 받아낸 경기 지역의 병원은 웨스트 증후군에 무지했고, 민준이의 작고 여린 몸은 태어나자마자 수백번의 발작을 일으켰다. 차가운 병동 매트리스 위에서 민준이는 그렇게 3주를 보냈다. 결국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뇌 절반 이상이 손상됐다. 엄마(47)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답답해 병원을 옮기겠다고 하니, 병원이 요구한 진료 포기각서를 쓰고 서울에 갔다”고 말했다.
결국 서울의 대형 병원에서 민준이의 병명을 확인한 엄마는 반년 뒤, 6종류의 약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도 아직 고난이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걸 짐작만 했다. 약값은 물론이고 일회용이라는 물약병 비용도 부담스러웠다. 엄마는 “일회용이라는데 한 번만 쓰면 안 돼서 씻은 뒤 말렸다가 쓰곤 한다”고 말했다. ‘물약병 100개들이에 1만원이 넘는다’는 돈 얘기를 할 때 울컥하던 엄마는 아이 생각을 하면 미안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희귀병인 웨스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민준이의 어머니가 민준이 배에 있는 위루관 흉터를 보여주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 위루관 제거에서 맛본 희망도 잠시
2019년 강직된 민준의 팔은 만세 자세로 머리 위에서 도통 어깨 밑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조금씩 나아지던 음식 삼킴도 하지 못했다. 민준이는 투명한 관을 통해 위에 영양분을 넣는 위루관에 더 의존했다. 영영 음식 맛을 알기는커녕 삼킴조차 못하게 될까봐 엄마는 겁이 났고 카드를 돌려막기 시작했다. 1천만원을 준다는 말에 명의를 빌려줬더니 ‘가짜 집주인’이 돼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급여도 못 받는 처지가 됐다. 감당하기 어려운 카드빚으로 개인회생까지 내몰렸다.
엄마는 절박한 마음에 3년 전 행정복지센터(주민센터) 지푸라기를 잡았다. 무턱대고 전화를 걸었고, 도와달라고 말했다. 1년 뒤쯤 소개받은 밀알복지재단에서 치료비 월 120만원을 지원받았다.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민준이는 위루관을 2년 전에 몸에서 제거했다. 이제는 입 근육을 움직여 밥과 죽 사이 점성의 식단으로 식사한다. 엄마는 희망을 맛봤다. “위루관 쓰는 애들은 평생 쓴대요. 1년 만에 뺀 케이스는 극히 드물다고 했었어요.”
민준은 지난달까지 물리·작업·인지 치료 등 8가지의 치료를 받았지만, 현재는 급여 적용이 되는 치료 3개만 받고 있다. 재단에서 모금한 치료비가 모두 소진되면서다. 엄마는 미래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과거를 돌이키면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 이런 게 아예 없어요.”
■ 평범한 삶이 꿈이었지만
엄마의 꿈인 ‘평범한 삶’은 20대 때만 하더라도 멀리 있지 않았다. 번듯이 취업해 번 돈으로 전셋집을 구했지만, 홀로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전세금으로 민아(가명·16)를 키웠다. 아이를 맡길 곳은 없었고, 아르바이트로 대출 전단지를 뿌리며 한달에 몇십만원씩 바짝 벌었다. 나머지 시간은 민아를 돌봤다. 생활은 점차 궁핍해졌고 높은 고층 빌라에서 반지하로 내려갔다.
그러다 민준의 아빠를 만났지만 가난의 골은 더 깊어졌다. 사업에 실패한 뒤 일용직으로 전전했지만 추락 사고를 당하면서다. 끝내 간경화까지 찾아왔고 다시 가정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나마 긍정적이었던 남편은 하루가 다르게 우울해졌다. 엄마는 자녀 둘을 온전히 책임지게 됐다.
엄마는 중학생인 민아의 학교생활과 진로가 늘 마음에 걸린다. 최근 딸이 가장 낮은 이(E)등급을 받은 성적표에도 긴 밤을 지새우며 답답함을 삼켰다. 엄마는 “왜 공부를 그것밖에 못 하냐는 대화를 하고 싶어도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된다”고 말했다. 딸의 성적을 책임질 돈은 주머니에 없고, 결국 성적도 모른 체하는 노력이 날마다 필요했다.
민아의 꿈은 웹툰 작가다. 엄마는 “웹툰 학원에 전화해서 알아봤더니 한번 갈 때마다 9만원 결제해야 한다고 그래서 대학교 갈 때쯤 학원을 보내주겠다고 말했다”고 말했다. 엄마는 “일상적인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아이로 키우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고 말했다.
희귀병인 웨스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민준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다. 방금 전까지도 짜증을 부리던 민준이는 엄마의 온기가 닿자 표정이 온화해졌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 “아이가 커질수록 슬퍼”
홀로 자녀 둘을 근근이 키워온 47살 엄마는 무채색 똑딱핀으로 흘러내리는 머리를 고정하고, 쉽게 구겨지지 않는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민준이 침이 묻어도 티 나지 않고 언제든 뛸 수 있는 옷이었다.
현재 민준이네 소득은 월 60만원이 전부다. 민준이를 돌봐야 하는 엄마가 같은 재활치료실에 있는 다른 장애아를 돌봐주면서 받는 돈이다. 민준이가 재활치료를 받는 동안 짬 나는 시간에 겨우 일한다. 이 돈으로 민준이 약과 연하제(삼킴을 도와주는 보조제), 기저귀 등 치료비 외에 필요한 용품을 산다.
민준이 몸이 커질수록 엄마는 슬퍼진다. 이름 없는 기저귀를 쓰는데도, 크기가 커질수록 가격은 비싸다. “직구로 산 이름 없는 브랜드 기저귀조차 사이즈가 클수록 비싸지니 걱정이에요.”
휠체어 등 의료기기는 말할 것도 없다. 장애아인 민준이가 항상 비스듬히 앉아 있는 파란색 의자 피더시트(착석보조기기)도 100만원짜리 의료기기다. 민준이가 잘 때를 제외하고 앉아 있는 피더시트는 민준이의 놀이터이자 식탁이다. 이것만큼은 온전히 민준이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고 싶은 게 엄마 마음이지만, 민준이 몸이 커지면 적지 않은 돈을 주고 또 교체해야 한다. 당장 휜 발목을 교정해줄 80만원짜리 보조기기도 없어, 민준이 양발은 안쪽으로 말려 서로 마주하고 있다.
엄마는 답답한 마음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민준이를 향해 활짝 웃었다. 밥맛을 느낄 수 있게 된 민준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고.
민준이네 가정에 도움을 주시려는 분은 계좌로 후원금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하나은행 188-910030-69104, 예금주: 사회복지법인밀알복지재단) 또 다른 방식의 지원을 원하시는 분은 밀알복지재단(1600-0966)으로 문의해주십시오. 모금에 참여한 뒤 밀알복지재단으로 연락 주시면 기부금 영수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금 목표액은 1500만원입니다. 후원금은 민준이네 가정의 재활치료비, 의료소모품비, 긴급생계비 등으로 사용될 예정입니다. 밀알복지재단은 민준이네 가정 상황을 지속적으로 살피며 후원금을 투명하고 성실하게 전달하겠습니다. 1500만원 이상 모금될 경우, 목표액이 넘는 금액은 민준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장애아동에게 지원됩니다.
보도 이후
한겨레와 대한적십자사가 함께한 나눔꽃 캠페인을 통해 암 투병 가족들과 무너지는 흙집에서도 씩씩하게 미래를 향해 꿈을 키워나가는 13살 효빈이네 가족의 사연(한겨레 2023년 9월5일치 12면)이 소개된 뒤 423분께서 “효빈 가족 힘내세요”, “행복해 효빈아!”라는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2016만2768원(10월5일자 기준)의 정성을 모아주셨습니다. 대한적십자사는 “어른스러운 효빈이가 가족들과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살피고 도울 예정이며, 다른 위기가정의 아이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전했습니다. 후원금은 효빈이네 교육지원비와 생계비로 전달됩니다. 효빈이네 가정을 위해 따듯한 마음을 보내주신 후원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배현정 기자
sprri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