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15일 이충상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오른쪽)이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한덕수 국무총리에게 임명장을 받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충상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상임위원이 심의가 완료되지 않은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한국옵티칼) 노조 진정사건에 대해 “기각하겠다”고 전원위원회에서 공개발언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진정인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과 인권단체들은 “공무원행동강령을 위반한 막말을 쏟아낸 이충상 위원에 대해 기피신청을 내겠다”고 밝혔다. 한국옵티칼 노조는 회사의 갑작스런 청산과 해고에 맞서 올해 초부터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공장 안에서 천막 농성을 진행 중이다.
이충상 상임위원은 지난 달 30일 열린 전원위원회에서 “구미사건(한국옵티칼하이테크 단수 진정 사건)은 기각할 거다. 불쌍한 근로자들을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수정 위원과 남규선 상임위원은 “심의중인 사건을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곤란하다. 인권위 공무원 행동강령을 위반하는 일”이라며 제지했다고 한다.
인권위법 제49조는 “위원회의 진정에 대한 조사·조정 및 심의는 비공개로 한다”고 돼 있다. 인권위 한 관계자는 “심의 중인 진정사건은 국회가 자료를 요청해와도 응하지 않을 정도로 비공개가 원칙이다. 사건을 맡은 소위원장이 미리 결론을 내고 이를 공개석상에서 밝히는 행위는 매우 부적절하다. 인권위법 뿐 아니라 인권위 공무원 행동강령 5조 ‘공무원의 인권옹호 책무’ 규정에도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상임위원의 발언은 전원위에서 논의됐던 ‘3명 중 1명만 반대해도 자동기각되도록’ 소위원회 의결 규정을 바꾸는 의안과 관련 부연설명을 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신속한 기각이 진정인들을 돕는 좋은 사례라면서 한국옵티칼 진정 건을 언급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국민의힘 추천으로 임명된 이 상임위원은 현재 이 진정사건을 다루는 침해구제2소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노동자들이 9월11일 오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회사 측이 단전·단수 조치를 강행한 것과 관련 규탄집회를 열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한국옵티칼 해고 노동자 13명은 올해 초부터 공장 안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해왔는데, 회사 쪽은 지난 9월8일 구미시 수도사업소에 요청을 해 단수조치를 한 바 있다. 이에 금속노조 한국옵티칼 지회와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의 명숙 활동가는 “지방자치단체장에게 단수조치 중단을 권고하라”며 인권위에 긴급구제신청을 냈고, 상임위원회에서 김용원·이충상 상임위원이 반대를 하면서 논의가 진척되지 않자 “인권침해를 세세하게 조사하라”며 긴급구제를 취하하고 소위 진정사안으로 넘긴 상태다. 명숙 활동가는 “결정도 되기 전에 기각을 단정하는 말을 발설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옵티칼은 일본 기업 니토덴코가 지분 100%를 가진 계열사로 2003년 구미4국가산업단지에 입주해 엘시디(LCD) 편광필름을 생산해왔다. 그러나 2022년 10월4일 공장에 불이 나자 니토덴코는 화재보상금 1300억원만 챙긴 뒤 한 달만에 회사를 청산하면서 노조에 희망퇴직 신청을 통보했다. 이에 응하지 않은 17명의 노동자가 올해 2월 해고됐는데, 이중 13명이 공장에 남아 회사 재가동과 평택에 있는 한국니토옵티칼로의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농성을 해왔다.
이충상 상임위원은 5일 한겨레에 “진정인들이 긴급구제신청을 취하했을 정도로 본안에서도 진정 인용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건이고, 긴급구제신청 및 그 취하가 이미 많이 알려져서 비밀이 아니며, 공익을 위한 발언이라서 전혀 위법성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옵티칼 긴급구제 취하는 아직 외부에 알려진 바 없다. 이에 대해 이충상 상임위원은 “창피해서 쉬쉬하냐”고 반문했다.
이 상임위원은 또한 “노조사무실의 출입이 자유이기 때문에 자기 집에 가서 샤워도 하고 잠도 자고 다시 와서 농성하고 있는 터에 수도를 더 이상 공급하지 않는 구미시가 인권침해자가 아님이 너무 명백하다”고 말했다. 전원위에서 언급한 ‘불쌍한 근로자’라는 표현과 관련해서는 “농성중인 근로자를 말한다. 1년 이상 일을 못하고 있고 농성을 계속하면서 행정소송 1, 2, 3심을 진행한다면 여러 해 더 일을 못하게 된다. 인권위 진정과 행정소송을 돕는 것은 그분들을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명숙 활동가는 “집에 가서 씻으며 된다는 발언은 노동자들의 절박한 현장 상황을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불쌍하다’는 표현이나 ‘법원에 가면 오래 걸리니 포기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할 인권위원으로서 할 말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금속노조 한국옵티칼 지회는 지난 3일 보도자료를 내어 “본인의 자의적 판단으로 기각하겠다고 단언한 것은 권한 남용이자 불공정한 행동”이라며 “이충상 상임위원의 사퇴와 해당 사건의 심의에 이충상 위원 기피신청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6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인권위는 2020년 4월 대구 재개발 현장의 건물 내부에 사람이 거주하고 있음에도 조합에서 음식물 반입 제한과 단수·단전 조치를 취한 것과 관련 긴급구제조치를 권고한 바 있다. 농성의 위법성을 떠나 농성자들의 기본적 생존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인도적 처우를 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