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월14일 본인이 기거 중인 경기도 안양의 한 요양원 면회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엄주분(98)씨.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100살을 눈앞에 둔 전직 ‘남파 공작원’이 재심을 신청한다. 공작원인 건 맞지만 수사 과정에서 고문 끝에 허위 자백을 했고, 하지도 않은 간첩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니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해달라는 취지다. 본인이 실제 공작원임을 인정하면서 재심을 청구한 첫 사례다.
박시환·김진한·조영관·황준협 등 4명으로 구성된 ‘남파 공작원’ 엄주분(98)씨의 변호인단은 6일 대법원에 재심신청서를 제출한다고 5일 밝혔다. 변호인단은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국군 수사기관이 엄씨를 수사·체포했고 △장시간 불법체포 구금 상태에서 자백이 이뤄졌으며 △남파 공작원은 맞지만 형법상 간첩죄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씨의 간첩행위 유죄 판결은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형사소송법은 ‘공소의 기초가 된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경찰이 저지른 직무 관련 범죄에 대한 확정판결이 있거나, 없다면 이를 증명해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데, 국군 수사기관이 불법 수사를 했으니 재심 개시가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다.
1925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난 엄씨는 소학교 시절 은사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전쟁 때 월북해 1957년 평화통일 선전 목적으로 남파됐다. 이후 특별한 공작활동 없이 부산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엄씨는 1958년 부산에서 체포됐고, 부산 해병대 특무대 등에 구금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불법 구금·고문 과정에서 나온 엄씨 자백을 근거로 1·2심에서 사형이 선고됐고, 1960년 대법원은 무기징역형을 확정했다. 1962년 3월 엄씨는 수감 중 전향했고, 1979년 대전교도소에서 가석방됐다.
변호인단은 엄씨가 남파된 것은 맞지만 ‘형법상 간첩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형법상 간첩죄는 ‘적국을 위해 국가기밀을 탐지·수집해 제보하는 것’인데 엄씨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엄씨가 재심을 신청하기로 결심한 데에는 자신의 진술로 처벌받은 이들에게 사죄하는 마음도 깔려 있다. 남한 정착 과정에서 만난 자동차 수리공 장아무개씨 등이 엄씨가 간첩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고문 끝에 허위 자백했고, 이들은 모두 간첩방조죄로 처벌받았다. 엄씨는 한겨레와 만나 “나의 간첩 혐의가 무죄가 되면 나 때문에 처벌을 받은 사람들의 죄도 씻기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재심 개시가 결정되면 본격적으로 고문·가혹행위 증명과 함께 이 사건이 간첩죄 구성요건에 해당되는지 다툴 계획”이라며 “나아가 (엄씨가 남파공작원이라 해도) 장기간 불법구금으로 고문을 받았으면 재심으로 무죄 판결을 해주는 게 진짜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했다. 엄씨에 대한 재심개시 여부는 엄씨에 대한 최종형을 확정한 대법원이 결정한다.
변호인단에 참여한 박시환 전 대법관은 “형사사법절차가 인권 보호 책무를 다하지 못했던 어두운 과거의 한 장면을 바로잡는 일이라는 생각에 동참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엄씨 사건과 쟁점이 유사한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의 2011년 1월 재심에서 대법원이 전원일치 의견으로 무죄 판결을 내릴 때 주심을 맡은 바 있다.
엄씨의 존재를 찾아내고 재심 결심까지 이끈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해병대 특무대, 해군정보국 안가 등에 영장 없이 갇혀 지내며 고문당한 사실을 법원도 외면할 수 없으리라 본다”며 “이번 재심을 진영논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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