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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고종 황제의 옥새 교통카드…탑승을 윤허하노라

등록 2023-12-22 11:43수정 2023-12-22 18:38

[한겨레21]
“일상에서 쓰이는 전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
여성 공예 창업가 명수기·김혜원·이예빛 대표
옥새 교통카드. 와디즈 갈무리
옥새 교통카드. 와디즈 갈무리

우리 곁에 있지만 힙(hip)한 줄 몰랐던 것, 남들이 찬탄한 뒤에야 비로소 눈에 띄는 것들이 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에서 불티나게 팔린 경북 영주대장간의 호미(전통 농기구 그 호미가 맞는다. 2019년부터 원예 부문 상위권),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2019~2021년)에서 좀비보다 더 눈길을 모은 조선시대 모자(갓) 등이 대표적 사례다.

명품 패션 기업 구찌가 2023년 2월 문화재위원회에 경복궁 근정전 패션쇼를 허락해달라며 보낸 신청서에는 “경복궁의 역사성과 동시대적 아름다움에서 영감을 받은 의상을 소개하는 행사”라는 문구가 포함됐다.

이예빛 몸 대표가 칙명지보를 모델로 만든 ‘옥새 교통카드’의 모습. 서울여성공예센터 제공
이예빛 몸 대표가 칙명지보를 모델로 만든 ‘옥새 교통카드’의 모습. 서울여성공예센터 제공

경복궁만이랴. 전통을 품은 한편 지금 이 시대 기준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들이 우리와 공존한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더 많은 이에게 전하려 애쓰는 신진 여성 공예 창업가들도 있다. 색동·단청·조각보 등을 소재로 패션·리빙 소품을 만드는 ‘명썸’의 명수기(52) 대표, 나전칠기와 고려청자를 접목한 스카프를 만든 ‘엠마누보’의 김혜원(47) 대표, 자개·목재 등 다양한 재료로 아이디어 제품을 선보인 ‘몸’(MHOM)의 이예빛(27) 대표를 2023년 12월11일 서울 노원구 서울여성공예센터 더아리움에서 만났다.

왼쪽부터 김혜원 엠마누보 대표, 명수기 명썸 대표, 이예빛 몸 대표. 류우종 기자, 서울여성공예센터 제공
왼쪽부터 김혜원 엠마누보 대표, 명수기 명썸 대표, 이예빛 몸 대표. 류우종 기자, 서울여성공예센터 제공

■ 색동 전통 방식 직조업체 딱 한 곳 남았지만

명수기 대표는 “머리 쓰는 일을 오래 해서 몸 쓰는 일을 제2의 인생으로 살고 싶어” 20여 년 다니던 여행사를 2014년 관두고 각종 공예 교육을 받았다. 그가 꽂힌 건 손 쓰는 일, 바느질과 재봉틀이었다.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은 명 대표는 2018년 명썸을 창업했다.

“여행사에서 일할 때 유럽 지역 담당이라 유럽 각 나라를 다니며 기념품을 샀거든요. 어느 상품에나 전통이 녹아 있고 프라이드(자부심)가 강한 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좋은 건 너무 비싸고 싼 건 조잡해서 ‘중간’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직접 만들어보고 싶었죠.”

“지극히 한국적인 것을 만든다”는 기업 소개를 듣고 명썸 제품을 보면 지극히 동시대적이기도 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연인>(MBC)에서 길채(안은진)가 느끼는 겨울 추위, 캐릭터의 사랑스러움을 돋보이게 한 귀도리(귀마개)는 전통 방한구 ‘볼끼’에서 착안한 소품이다. 명 대표는 2019년부터 귀도리와 목도리를 겸할 수 있는 볼끼를 제작했다.

명 대표가 특히 사랑하는 문양은 색동이다. 삼국시대부터 1700여 년 이어진 색동은 음양오행 사상에 기반해 장수, 풍요, 행운 등을 염원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데 쓰였다. “제가 어릴 때는 직접 (색동저고리 한복을) 입기도 했는데 지금은 거의 다 사라졌죠. 그런데 전 색동을 너무 좋아하고, 색동으로 현대적인 걸 만들어봐야겠다 싶어서 가방, 볼끼 등을 만들었어요. 색동 앞치마가 인기를 얻어서 지금은 효자 상품이 됐죠.” 일상에서 색동을 이용한 의복과 생활용품 등이 사라지면서 전통 방식으로 색동 원단을 직조하는 업체는 전국에서 딱 한 곳(동원직물) 남은 상태다.

명썸에서 만든 다양한 소품들. 명썸 제공
명썸에서 만든 다양한 소품들. 명썸 제공

■ 뉴욕 텍스타일 디자이너가 나전칠기를?

2023년 엠마누보를 창업한 김혜원 대표의 ‘주 종목’은 나전칠기를 만드는 전통 기법 가운데 하나인 ‘줄음질’(주름질)이다. 자개를 직접 디자인한 도안에 맞춰 다이아몬드 줄톱으로 정교하게 잘라 문양을 만든다. 김 대표도 경력을 확장했다. 그는 미국 뉴욕에서 15년 동안 텍스타일 디자이너(패션 관련 프린트 작업)로 일하며 개인전을 여는 등 갤러리 전속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2019년 한국에서 개인전을 위해 귀국한 동안 나전칠기를 접했는데, 그 매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나전칠기 공예 작업을 지속할 방법을 찾던 중, 한국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는 서울여성공예센터의 신규 입주기업 모집 공고를 봤다. 공예·디자인 분야 여성 예비창업자와 창업 5년 미만 초기 창업자에게 최대 2년 동안 창업실 공간을 지원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업계획서’라는 걸 써봤다.

디자인부터 마무리까지 모든 작업을 ‘핸드메이드’로 작업하는 나전칠기는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김 대표는 공예 작업 외에 “나전칠기 예술의 대중화를 바라며, 나전칠기를 누구나 몸에 걸칠 수 있는 스카프 상품으로 개발”했다. “(서울여성공예)센터에 입주한 뒤 페어, 팝업스토어 등 여러 프로젝트에 지원했는데 초기엔 여러 번 떨어졌거든요. 예술 작품을 위주로 한 게 문제더라고요. 그러다가 제가 원래 잘하던 분야, 텍스타일디자인을 접목하면 되겠다 싶어서 나전칠기를 스카프로 만드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죠.”

김 대표는 2022년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나전칠기 스카프’로 후원자 100명을 모아 600여만원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2023년 국립박물관문화재단과 서울여성공예센터의 협업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고려청자를 나전칠기로 디자인한 스카프 등을 선보였다. 이 스카프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의 뮤지엄숍 ‘뮷즈’에도 입점해 매출 성과를 냈다. “전통을 옛 도안 그대로 만들기보다 예술적으로 재해석해서 ‘아트 굿즈’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요. 그게 ‘오늘의 전통’이라 생각하고요.”

엠마누보에서 만든 트윌리, 스카프들. 서울여성공예센터 제공
엠마누보에서 만든 트윌리, 스카프들. 서울여성공예센터 제공

■ 박물관 옥새가 교통카드 됐다

전통공예를 재해석한 상품을 개발하는 데서 나아가, 박물관에 둬도 위화감이 없을 물건을 일상으로 끌어온 아이디어 상품도 있다. 이예빛 대표가 2023년 11월27일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와디즈에 공개한 ‘옥새 교통카드’ 펀딩은 일찌감치 1억원을 돌파했다.

옥새 교통카드는 1897년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에 오르면서 만든 국새 가운데 하나인 ‘칙명지보’(勅命之寶) 디자인을 일부 변형해 3차원(3D) 프린터로 출력해 만든다. 지하철과 버스를 탈 때마다 옥새를 찍으며 황제가 된 기분을 누릴 수 있다. “삑―황제입니다.” “탑승을 윤허하노라!”(옥새 교통카드에서 실제 이런 소리가 나는 건 아니고 상황극 묘사다.)

이 대표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던 대학생 시절부터 직접 만든 목재공예품을 판매했다. 판타지소설 <해리 포터>에 등장하는 마법지팡이에 영감받아 한국 전통문양과 자개 등을 결합한 다양한 콘셉트의 지팡이를 만들었다. 2021년에는 주변의 권유로 텀블벅 펀딩을 시작하며 사업자등록을 처음 내기도 했다. 2023년 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여성공예센터에 입주해 본격적으로 창업활동에 나섰다.

옥새 교통카드. 와디즈 갈무리
옥새 교통카드. 와디즈 갈무리

“저는 ‘전통의 이야기’를 물건으로 풀어내는 일이 좋아요. 옥새 교통카드 전에도 혼천의(1669년 만들어진 천문시계, 국보 제230호)를 모델로 아크릴 선캐처(햇빛을 반사해 빛무리를 퍼뜨리는 인테리어 소품)를 만드는 작업을 했거든요. 유물로 존재하는 것을 일상에서 새롭고 재미있게 쓸 수 있도록 하는 게 제겐 즐거운 일이어서 그런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이 대표는 역사 버추얼 스트리머(가상 인간 모습으로 방송) ‘향아치’에게 옥새 교통카드 광고를 의뢰하는 등 칙명지보에 담긴 이야기도 적극 홍보했다. 고종이 독도에 대한 대한제국 주권을 천명한 칙령에 해당 국새가 쓰인 점, 일제강점기 수많은 국새와 어보가 약탈당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대한제국 시기 국새가 칙명지보를 포함해 3개만 보관됐다는 사실 등을 전했다. 펀딩 스토리에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전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문구가 포함됐다. 이 대표는 “거창한 사명감이 있는 건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잊혔던 것들이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바쁘게 살면서 번아웃(소진) 오는 사람이 많잖아요. 저는 미래에서 답을 찾기엔 어렵고 무섭지만 과거에 소중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새로운 힘을 얻는 편이에요. 그래서 ‘예전에 이렇게 좋은 게 있었네? 지금도 계속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역사를 뒤적거리며 추억상자에서 (추억을) 꺼내오는 느낌으로 작업해요.”

몸에서 만든 다양한 소품들. 서울여성공예센터 제공
몸에서 만든 다양한 소품들. 서울여성공예센터 제공

■ ‘성덕’ 공예창업가들의 특별한 공통점

삶의 경로는 달라도 세 사람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밥벌이로 삼았다는 점에서 닮았다. 이른바 ‘성덕’(성공한 덕후의 줄임말)인 셈이다. 또 세 사람은 작품과 상품, 창작자와 창업가 사이에 뚜렷한 경계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창업 교육을 들을 때 내가 작가인지 사업가인지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얘길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굳이 경계 짓지 않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걸 팔기 위해 적당한 가격을 찾는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여러 노력 끝에 단가를 맞출 수 있게 됐고, 제가 좋아하는 요소와 살 사람들이 좋아할 요소를 골고루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며 ‘사업하는 공예가가 되자’고 생각했죠.”(명수기 대표)

이들이 작가와 사업가를 칼같이 나누지 않는 이유는 두 역할 사이 스펙트럼이 지금보다 더 넓어지기를, 더 다양한 종사자와 소비자가 출현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대량생산이 쉽지 않은 공예문화산업은 소규모로 제작, 판매, 유통하는 업체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국내 공예사업체 관련 종사자 수는 총 6만4219명으로 추정되는데, 사업체의 86%는 개인사업자이고 업체당 연평균 매출액은 1억7841만원이다(2022 공예산업 실태조사).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온라인 유통이 한층 활발해졌지만, 여전히 판로 개척이 가장 어렵다. 세 사람이 서울여성공예센터를 찾은 이유다.

그래도 세 사람은 자신이 만드는 상품의 가치를 알아볼 소비자들을 믿는다. “저는 오랫동안 전통을 더 멋있고 더 세련되게 살리려 한 앞선 생산자들의 노력이 쌓여서 요즘 빛을 보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갈수록 사람들이 좋은 걸 알아차리는 소비 감각이 발달하는 것 같고요. 모든 주체가 함께 달라지고 있어요.”(이예빛 대표)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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