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고문치사 사건으로 박종철씨가 숨진 서울 용산구 남영동 옛 치안본부(현재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앞마당에서 14일 오후 ‘박종철 열사 20주기 추모식 및 6월 민주항쟁 20년 사업 개막 선포식’이 열렸다. 이종률 추모식 추진위 사무국장(오른쪽)이 추모무대를 내려다보며 행사의 흐름을 살피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온몸 깃발된 그대’ 다시 나부끼다
옛 대공분실 앞 추모식…509호실 헌화
이택준 경찰청장 화환 구석으로 밀려나
14일 오후 2시, 지금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가 된 서울 용산구 남영동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 앞마당에 정태춘, 양희은씨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20년 전 이곳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고 박종철씨를 추모하기 위해 300여명이 모여들었다. 흰 머리의 노인도 있었고, 어느새 마흔을 넘긴 박종철씨의 또래들도 있었다. 그들의 손을 꼭 잡은 어린이들도 보였다. 여야 국회의원과 재야인사 등이 참석했지만, 사회를 맡은 영화배우 오지혜씨는 “그동안 민주화를 위해 애써온 분들이 모이셨다”는 말로 내빈 소개를 대신했다.
묵념이 끝나고 ‘임을 위한 행진곡’에 맞춰 검은색 7층 벽돌건물을 뒤덮은 검은 천이 걷혀졌다. 1987년 수많은 대학생들이 가슴에 달고 거리를 내달렸던 박씨의 초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20년 전 문영태씨의 판화를 가로 7m, 세로 13.의 대형 걸개그림으로 복원한 것이다.
“이름 한 번 부르기만 하는데도/어찌 이리 마음이 아픈지요/어찌 이리 마음이 무거운지요/어찌 이리 부끄럽고 미안한지요!” 추모시를 읽는 이해인 수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박씨의 아버지 박정기씨는 “아들이 떠난 이후 사람들의 ‘그대 온몸 깃발되어’라는 말이 늘 귓가에 쟁쟁했다”며 “추운 날씨에도 여기 찾아오신 모든 분들 마음 속에 작은 깃발 하나씩 품고 계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추모식이 끝나고 참석자들은 건물 뒷문으로 들어갔다. 박종철씨를 비롯해 이곳에서 조사받던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뒷문으로 들어서자, 5층으로 이어지는 좁고 가파른 나선형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추모객들은 창문 하나 없는 캄캄한 계단을 후들거리는 다리로 올라갔다. 박씨가 숨진 4평 남짓한 509호실의 침대와 철제 책상, 세면대, 욕조는 추모객들이 내려놓은 흰 국화꽃으로 뒤덮였다. 추모객들이 모두 떠난 앞마당 추모무대 가운데엔 인혁당 사건 유족과 김상진 기념사업회가 보낸 작은 조화 바구니 2개가 남았다. 대공분실이 인권보호센터로 바뀔 만큼 세월은 변했지만, 이택순 경찰청장이 보낸 커다란 화환은 행사장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희생정신 계승·발전을
모교 혜광고 150여명 민주화 완성 결의
“6월 항쟁을 기념하지도, 박종철의 죽음을 추모하지도 맙시다.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고 박종철씨 20주기 추모제가 그의 모교인 부산 혜광고에서 13일 오후 유족과 친구, 시민사회단체 회원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추모행사장은 박씨 넋을 기리기보다, 그의 희생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다함께 완성하자는 결의로 뜨거웠다.
추모사에서 박씨 친구 김치하(43·회사원)씨는 “먼저 간 친구 앞에 부끄럽지 않고 역사 앞에 진정으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우리 친구들 모두가 약속한다”고 밝혔다. 부산민중연대 안하원 공동대표도 “그의 희생정신을 박물관에 걸어두는 박제로 만들 것이 아니라, 계승 발전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추모강연을 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승리를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6월 항쟁은 적은 희생으로 승리한 운동이었다”며 “승리의 규모에 견줘 희생이 적었던 것은,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문턱이 낮은 운동’으로 박종철 열사가 자신의 목숨을 던져 6월 항쟁을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씨 아버지 박정기(79)씨는 “사람은 연륜이 쌓이면 주름살이 생기지만, 종철이 모습은 20년 전 그 모습 그대로이고, 노도와 같은 87년 그날의 함성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있다”며 “민주화의 꽃을 피우고 민중의 소리를 확산시키기 위해 종철이 죽음을 밑그름 삼아 한마음으로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부산/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이름 한 번 부르기만 하는데도/어찌 이리 마음이 아픈지요/어찌 이리 마음이 무거운지요/어찌 이리 부끄럽고 미안한지요!” 추모시를 읽는 이해인 수녀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박씨의 아버지 박정기씨는 “아들이 떠난 이후 사람들의 ‘그대 온몸 깃발되어’라는 말이 늘 귓가에 쟁쟁했다”며 “추운 날씨에도 여기 찾아오신 모든 분들 마음 속에 작은 깃발 하나씩 품고 계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추모식이 끝나고 참석자들은 건물 뒷문으로 들어갔다. 박종철씨를 비롯해 이곳에서 조사받던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뒷문으로 들어서자, 5층으로 이어지는 좁고 가파른 나선형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추모객들은 창문 하나 없는 캄캄한 계단을 후들거리는 다리로 올라갔다. 박씨가 숨진 4평 남짓한 509호실의 침대와 철제 책상, 세면대, 욕조는 추모객들이 내려놓은 흰 국화꽃으로 뒤덮였다. 추모객들이 모두 떠난 앞마당 추모무대 가운데엔 인혁당 사건 유족과 김상진 기념사업회가 보낸 작은 조화 바구니 2개가 남았다. 대공분실이 인권보호센터로 바뀔 만큼 세월은 변했지만, 이택순 경찰청장이 보낸 커다란 화환은 행사장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고 박종철씨 20주기 추모제가 지난 13일 오후 모교인 부산 중구 보수동 혜광고에서 열렸다. 혜광고 재학생들이 선배 박씨의 추모비에 헌화하고 있다. 부산/연합뉴스
고 박종철씨 20주기 추모제가 지난 13일 오후 모교인 부산 중구 보수동 혜광고에서 열렸다. 혜광고 재학생들이 선배 박씨의 추모비에 헌화하고 있다. 부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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