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필름’끊긴 처제와 성관계 무죄 판결에 여성계 ‘남성중심적 판결’ 비판
“피해여성이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겨 성관계 했더라도 적극 저항하지 않았다면 준 강간 아니다.” (2005년 3월28일 서울고법 형사4부 엄상필 판사)
만취 상태에서 형부와 성관계를 맺은 여성이 형부를 준 강간죄(만취를 이용, 여성의 의사에 반해 성관계를 가진 죄)로 고소한 사건에 대해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한 것과 관련해 뒷말이 나오고 있다.
여성계와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이 며느리를 성추행한 시아버지와 20대 여비서를 번갈아 성폭행한 시각장애인들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 정신지체장애인 성폭행 피고인 무죄판결 등과 마찬가지로 남성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개선을 요구하고 나섰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28일 술을 마시고 의식을 잃은 자신과 성관계를 가진 형부를 준 강간죄로 고소한 사건과 관련 피고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필름이 끊어진 걸 이용해 형부가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지만 “피고인이 처제의 술 취한 상태를 이용해 성관계를 가졌다고 확실히 단정하기 어렵다”며 1심 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성폭력 정황이 있지만, 증거가 없는 한 ‘피고인을 무죄로 본다’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명백한 성폭력 증거가 없는 이 사건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앞서 1심법원인 수원지법 안산지원은 “아무리 술에 취했더라도 지각이 있는 한 고소인이 언니와 남자친구가 방에서 잠자고 있는 집 거실에서 형부의 성관계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인정하면서도 “고소인이 술에 취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진 상태에서 형부의 성관계 요구에 응했거나 적극 저항하지 않자 피고인이 동의하는 것으로 알고 성관계를 가진 것 같다”며 무죄로 판결, ‘만취상태였지만 동의한 줄 알았다’는 가해자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심신상실’ 상태를 어떻게 봤느냐? 가 유·무죄 판단의 근거
재판부가 피고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데는 피해자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느냐에 따라 강간죄 여부를 판단하는 현행 법적용에 기초했다. 재판부가 이번 사건이 ‘성폭행’이라는 피해자의 주장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이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명확하지 않아 유죄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해석 때문이었다.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가해자의 폭행·협박은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 하고, 그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었는지 여부는 그 폭행·협박의 내용과 정도는 물론 유형력을 행사하게 된 경위, 그러한 폭행·협박이 피해자에게 미친 심리적, 육체적인 영향, 피해자와의 관계, 성교 당시와 그 후의 정황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2004. 6. 25. 선고 2004도2611 판결, 1999.4.9. 선고 99도519 판결 등 참조).
여성계나 법조계 안팎의 불만은 성폭력 범죄의 특성상 현실적으로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임을 증거로 제출하기가 쉽지 않은 점을 악용해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피고인인 남성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는 의혹 때문이다. 또 재판관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점에서, 성인지적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 사건에서도 재판부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좋아서 성관계를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는 피해자 남자친구의 증언과 “피해자가 성관계 사실을 전해 듣고도 피고인에게 강력한 항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동의에 의한 성관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자 자신만이 증거를 댈 수 있는, “필름이 끊긴 상태”라는 피해자의 ‘심신상실’ 주장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피고인의 변호를 맡았던 김아무개 변호사는 “이 사건의 핵심은 성관계가 강제로 이뤄졌느냐, 합의에 의해 이뤄졌느냐”라며 “피고인의 부인과 피해자의 남자친구가 자는 방에서 성관계를 맺을 경우에는 오히려 합의보다는 강제로 성관계하기가 더 어렵다”며 재판부의 판결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여성계의 시각은 이와 다르다. 김보연 한국성폭력상담소 간사는 “심신상실 상태에 대한 증거가 없어 피해자의 동의가 있었다고 보는 피해자의 배려 없는 비현실적인 논리”라며 “가해자와 피해자 양자간에 벌어지는 성폭력 범죄의 특성상 피해자가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의 상태를 입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이어 현행 형법이나 이를 고스란히 따르는 재판부의 시각은 남성중심주의적인 법체계와 판결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성 관련 소송전문가인 이명숙 변호사도 “피해자가 만취해서 대항을 할 수 없을 정도면 준 강간으로 봐야 하지만 이를 증명할 증거가 없고, 현행법상 강간 유무를 판단하는 항거불능이나 심신상실의 상태를 좁게 해석하기 때문에 무죄가 선고된 것 같다”며 “이 사건뿐 아니라 성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현실이나 상황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하지 못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이번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도 “술에 취하면 음주습벽이 있다”, “사건 당시 피해자가 술에 만취되어 피고인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 같다”고 진술한 피해자 남자친구의 발언을 주목하면서도 “구체적 증거가 없어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여성계 “ ‘남성중심적 판결 사례’ 잇따라” 비판
여성계와 법조계 안팎의 비판과 우려는 최근 일련의 재판에서 보이는 ‘남성중심주의적’ 판결에 따른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며느리를 성추행한 70대 시아버지가 고령이고 분별력이 떨어지는데다 잘못을 뉘우치고 있어 집행유예를 선고한다.” (2005년 3월24일 서울고법 형사2부 전수안 부장판사)
“여성을 번갈아 성폭행한 시각장애인들에 대해 재범의 우려가 없고, 범행을 깊이 뉘우치고 있어 집행유예를 선고한다.” (2004년 12월30일 서울 북부지법 형사11부 박철 부장판사)
“장애인 미성년자이더라도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피해자 무죄다!” (2004년 9월16일 부산고법 형사2부 윤재윤 부장판사)
이들 사건에서 보듯, 재판부는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피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뿐 아니라 유죄가 입증된 피고인들에 대해서도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등 잇따라 솜방방이 처벌을 내렸다. 지금과 같은 법 적용이라면 “미니스커트를 입은 피해자가 성폭행을 당했을 경우…”, “피해여성이 목숨을 걸고 저항하지 않았다면…”, “(술 취한) 여성이 밤길을 홀로 다니다 성폭행을 당했을 경우…” 등의 단서가 달린 사건에서 법 적용은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개연성이 높다. 처벌 또한 가벼워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는데도 차질을 줄 수밖에 없다.
김보연 간사는 유사한 사례로 지난 2월에 있었던 정신지체장애인 성폭력 사건을 꼽았다. “이 사건에 대해 재판부는 피해자의 정신지체 정도보다는 ‘피해자가 신체장애인이 아니어서 장애인인 줄 몰랐다’는 가해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준 강간 처리를 하지 않았다”며 “성폭력 당시 정신지체장애인이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데다, 증거를 대는 것이 가능한 것이냐”며 현행 법의 모순을 지적했다.
항거불능 상태 아니면 ‘무죄?’, 범죄 뉘우치면 ‘집유?’
조국 교수 “강간죄는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그렇다면, 성폭력 범죄를 취급하는 현행 형법이 갖고 있는 오류는 무엇일까. 문제를 제기하는 쪽에서는 강간 및 성폭력 범죄의 구성요건인 ‘심신상실’과 ‘항거불능’ 규정“”의 모호성과 협소성을 꼽고, 이와 관련한 법리판단의 기준을 대폭 확대하거나 아예 삭제할 것을 요구한다. 형사법의 성편향성을 연구해 왔던 서울대 법대 조국 교수도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지적한 바 있다.
조국 교수는 <형법상의 성편향(2003. 박영사)>에서 “우리나라의 통설은 피해여성이 거부의사를 밝혔더라도 가해자가 피해자의 저항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하거나 반항을 현저하게 곤란하게 할 정도에 미치지 않는 수준의 폭행·협박을 행사하였다면 강간죄로 보지 않는다”고 지적한 뒤 “강간죄의 성립 여부는 가해자의 폭행·협박의 정도가 아니라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하며, ‘최협의의 폭행(항거불능 상태)’으로 한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강지원 변호사 “필사의 반항만 인정하는 협소한 항거불능 규정 바꿔야”
최일숙 변호사 “ ‘항거불능’의 상태를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재구성해야”
강지원 변호사는 “여성이 진지하고도 계속적인 성관계 거부의사를 표명했다면 강간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피해자들이 의식을 잃었거나 죽기를 각오한 반항을 할 때만 인정하는 협소한 판단규정을 바꿔야 하며, 대법원 판례 역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보연 간사는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의 개념을 피해자 현실에 맞게 폭넓게 적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일숙 변호사는 “이번 사건의 경우 필름이 끊긴 것을 증명할 사람은 피해자밖에 없다는 점에서 항거불능 상태와 무죄추정의 원칙을 어떻게 변형해서 적용할 것이냐가 핵심”이라며 “강간죄 구성요건에 있어 ‘반항할 수 없을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을 경우’와 ‘항거불능’의 상태를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명숙 변호사도 “범죄 당시 피해자의 현실이나 상황 등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피해자가 반항을 못할 만한 심리 혹은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세밀하게 관찰해 판결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또 여성감수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도 남성감수성을 가진, 남성 판사에 의해 다뤄지는 현행 재판시스템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강지원 변호사는 “남성 재판관에 의해 성폭력 사건이 다뤄질 경우 위기에 처한 여성의 심리를 담기가 어렵다”며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의 경우 여성 판사가 재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밖에 성범죄에 대해서는 성인지적 관점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탄력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보연 간사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가해자의 인격이 존중받는 동안 정작 성폭력 피해자는 자신의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인권을 훼손당하고 있다”며 “성폭력 범죄에 한해서라도 명백한 증거를 요구하는 규정을 유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간죄 여부 피해자 심리가 중요” 전향적 판결 나오기도
강간죄 판단에 있어 전향적 판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10월 서울북부지법 박철 부장판사는 강간죄 판단에서 가해자인 남성의 폭행이나 협박 정도가 가벼워도 피해자를 항거불능하게 만들었다면 성폭행이라고 판결했다. 이는 그동안 사법부가 항거불능의 개념을 지나치게 좁게 판단, 주로 외형적인 폭행·협박과 가해 남성의 범죄적 의도에 초점을 맞춰 강간죄 여부를 판단해온 판례에 비춰 오히려 피해 여성의 심리적 입장이 적극 반영돼야 한다는 시각이어서 전향적인 판결로 주목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성폭력 가해자의 폭행이나 협박 정도가 비교적 가벼웠다고 해도 피해자를 항거불가능하게 만들었다면 이는 성폭력으로 봐야 한다”며 처남과 동거 중인 김아무개(22)씨를 여러 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임아무개(29)씨에 대해 징역 2년6월을 선고했다. 임씨는 지난해 8월 김씨를 한 여관으로 불러서 입을 막은 뒤 때릴 것처럼 위협해 성폭행했다. 가해자 측은 강한 폭행이나 협박 행위는 없었다는 이유를 들어 무죄를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임씨의 폭행, 협박 정도가 비교적 가벼운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정황과 완력의 차이 등을 고려할 때 피해자에게는 강한 심리적, 육체적 영향을 미쳐 항거불가능하게 된 사정을 짐작해 임씨에게 실형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임씨의 폭행·협박 정도가 비교적 가벼운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정황과 완력의 차이 등을 고려할 때 피해자에게 강한 심리적, 육체적 영향을 미쳐 항거가 불가능 하게 된 사정이 참작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강간죄를 구성하는 ‘항거불가능한 폭행’을 판단하는 데는 현실적으로 표출된 폭행·협박만을 기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더 강한 폭행이 뒤따를 것으로 판단하고 피해자가 저항을 포기한데 상당한 이유가 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또 “외부로 표출된 폭행·협박의 강도와 가해 남성의 범죄적 악성에만 초점을 맞춰 강간죄를 판단한다면 완력으로 여자를 잡고 강제로 여성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기만 한 가해자는 강제추행죄로 처벌되지만 (강하지 않는 폭력으로) 피해 여성 의 옷을 벗기고 강제로 성행위까지 나아간 가해자는 무죄로 판단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진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강간죄 구성요건과 관련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었는가를 판단함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표출된 가해자의 폭행·협박의 내용과 정도만을 기준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당시 정황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의 폭행·협박에 대하여 저항할 경우 더 강한 폭행이 초래될 것으로 예상하였고 당시 정황에 비추어 피해자의 예상에 상당한 이유가 있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한다”고 해석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