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박물관 보존과학실 직원이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화재 진화 중 떨어져 부서진 숭례문 현판을 살펴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난 10일 밤 화재로 숭례문 누각이 소실된 가운데, 현판이 새삼 시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불기둥이 치솟는 상황에서 소방관이 현판을 가까스로 떼어내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면서 안타까움을 더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언론은 현판 글씨를 쓴 인물로 조선조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1394∼1462)을 지목했다. 문화재청과 서울시 누리집 등에 소개된 내용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숭례문 현판 글씨의 ‘원작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을 보면 “지금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 석 자는 그(양녕대군)가 쓴 글씨”라는 구절이 있어 통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는 <완당 전집>에서 “지금 숭례문 편액은 곧 신장의 글씨”라고 적어 놓아 이긍익의 주장과 다르다. 신장(1382∼1433)은 대제학을 지냈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했던 사람이다. 역시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면서도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근거로 “(정난종은) 세조 때 사람으로 비석이나 종에 글을 새기도록 임금의 명을 많이 받았다”며 “글씨체로 보아도 그의 것임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또한 이 글에는 임진왜란 때 현판이 일본인들에 의해 없어졌다가 난리가 수습된 뒤에 다시 걸렸는데, 이는 좋은 글씨가 땅에 묻히면 괴이한 빛이 나기 때문이라는 일화도 소개돼 있다. 정난종(1433∼1489)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서예에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잡지인 <별건곤> 1929년 9월치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시대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는 기록도 보인다.
이처럼 옛 기록의 서술들이 서로 엇갈려 현판 글씨의 ‘주인’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호암 문일평(1888∼1939)은 1935년 한 일간지에, 현판 글씨를 누가 썼는지를 밝히는 게 매우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사진 연합뉴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