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일 할머니
4·3항쟁 ‘소녀 연락책’ 김동일 할머니 고향방문
15살 좌익활동 뒤 수감…모친은 집단수용
“정의·인도라 판단”…경찰 피해 일본 밀항
위패봉안소 찾아 “거룩한 죽음 영원할 것” 팔순이 다 된 할머니는 연신 잔설이 남아있는 한라산을 올려다봤다. 비단이불 같은 고향의 푸른 하늘을 보고, 어머니의 품 같은 한라산을 보면서 그동안 쌓였던 타향살이의 서러움과 한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쏟아졌다.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의 위패봉안소에 놓여진 위패들을 보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평화공원에 가서 선배들의 죽음은 거룩한 죽음이고, 빛날 것이라고 외치고 왔어요. 이슬이 피가 돼서 선배들의 혼은 영원히 빛나고 있다고, 저 세상에서 언제나 살아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주4·3사건이 한창이던 1949년 겨울 토벌대에 붙잡혔던 ‘소녀 연락책’, 김동일(77·사진)씨가 고향을 떠난 지 60년, 한국을 떠난지 5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달 31일 제주를 찾았다. 지난 2일에는 제주 출신 재일동포 방문단과 합류해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도 다녀왔다. “15살 때 조국을 위해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당시로서는 정의와 인도에 맞는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지금에 와서는 그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그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지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 겁니까.” 연신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김씨는 죽기 전에 소원을 풀었다고 말했다. “조상 산소도 찾고, 친척도 만났습니다. 한라산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몇번이나 절규했어요. 꿈에도 그리던 고향땅에 왔다고. 50년 이상 꿈 속에 나타나던…” 4·3 당시 조천중학원생이던 김씨는 좌익 쪽에서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소개령이 내려져 중산간 일대 통행 금지로 산에 갇힌 뒤 49년 초 토벌대에 붙잡혔다가 광주형무소에서 짧은 옥고를 치렀다. 그 뒤 외삼촌이 있는 목포에서 살던 그는 경찰의 잦은 조사를 피해 57년 오빠와 언니가 있는 일본으로 밀항해 온갖 고생을 경험했다.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출신인 그는 19년 만세운동을 했던 고 김순택 선생의 사진과 기록이 있는 항일기념관에서 “그 때 정말 뱃속에 있는 기운을 다내 아버지와 함께 만세를 불렀다”고 회상했다. 8남매 가운데 막내인 그는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제자매들이 일본으로 가버려 어머니와 단둘이 조천에 살았었는데 나까지 산에 올라가버리자 어머니가 홀로 집단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됐던 것이 마음 아프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 않아요. 그것이 나의 운명이고 나의 다이아몬드라고 생각해요.” 제주/글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정의·인도라 판단”…경찰 피해 일본 밀항
위패봉안소 찾아 “거룩한 죽음 영원할 것” 팔순이 다 된 할머니는 연신 잔설이 남아있는 한라산을 올려다봤다. 비단이불 같은 고향의 푸른 하늘을 보고, 어머니의 품 같은 한라산을 보면서 그동안 쌓였던 타향살이의 서러움과 한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쏟아졌다.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의 위패봉안소에 놓여진 위패들을 보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평화공원에 가서 선배들의 죽음은 거룩한 죽음이고, 빛날 것이라고 외치고 왔어요. 이슬이 피가 돼서 선배들의 혼은 영원히 빛나고 있다고, 저 세상에서 언제나 살아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주4·3사건이 한창이던 1949년 겨울 토벌대에 붙잡혔던 ‘소녀 연락책’, 김동일(77·사진)씨가 고향을 떠난 지 60년, 한국을 떠난지 5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달 31일 제주를 찾았다. 지난 2일에는 제주 출신 재일동포 방문단과 합류해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도 다녀왔다. “15살 때 조국을 위해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당시로서는 정의와 인도에 맞는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지금에 와서는 그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그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지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 겁니까.” 연신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김씨는 죽기 전에 소원을 풀었다고 말했다. “조상 산소도 찾고, 친척도 만났습니다. 한라산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몇번이나 절규했어요. 꿈에도 그리던 고향땅에 왔다고. 50년 이상 꿈 속에 나타나던…” 4·3 당시 조천중학원생이던 김씨는 좌익 쪽에서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소개령이 내려져 중산간 일대 통행 금지로 산에 갇힌 뒤 49년 초 토벌대에 붙잡혔다가 광주형무소에서 짧은 옥고를 치렀다. 그 뒤 외삼촌이 있는 목포에서 살던 그는 경찰의 잦은 조사를 피해 57년 오빠와 언니가 있는 일본으로 밀항해 온갖 고생을 경험했다.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출신인 그는 19년 만세운동을 했던 고 김순택 선생의 사진과 기록이 있는 항일기념관에서 “그 때 정말 뱃속에 있는 기운을 다내 아버지와 함께 만세를 불렀다”고 회상했다. 8남매 가운데 막내인 그는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제자매들이 일본으로 가버려 어머니와 단둘이 조천에 살았었는데 나까지 산에 올라가버리자 어머니가 홀로 집단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됐던 것이 마음 아프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 않아요. 그것이 나의 운명이고 나의 다이아몬드라고 생각해요.” 제주/글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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