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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빈(49·아고라 필명·사진)
한국방송 촛불시민에 ‘무료카페’ 100일째 무빈씨
자유기고가 ‘노란천막’으로 시위 구심점
“어용노조 교체될 때까지 지켜볼 것” “일단 12월 케이비에스 노조 선거 때까지 지켜볼 예정이에요. 어용노조가 교체되면 공영방송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지속적으로 은은하게 피워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케이비에스라는 방송에 대한 애정이 식을 것 같아요.”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KBS) 본관 주변 전경차 행렬 옆, ‘노란천막’이라는 이름의 트럭이 서 있다. 그 트럭엔 양초, 생수, 컵라면, 커피 등과 음악을 들려주는 앰프, 각종 손팻말이 한가득 실려 있다. 이른바 촛불 시민들의 ‘노상카페’다. 돈은 받지 않는다. ‘노란천막 카페지기’ 무빈(49·아고라 필명·사진)씨는 감사원이 한국방송 특별감사에 들어간 지난 6월11일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 이 자리에 나왔다. 정부의 방송방악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서다. 100일을 하루 앞둔 17일 밤에도 어김없이 그는 ‘노란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백일간의 촛농으로 반질해진 길 위에는 30명 남짓의 촛불 시민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애초 천막은 7월 중순 강제철거당해 트럭이 대신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겐 ‘노란천막’이라 불린다. 촛불 시민들에게 ‘노란천막’은 갈증을 풀어주고 출출함을 달래주는 ‘고유명사’가 됐다.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놈’이 광우병 관련 보도를 분석하는데 깜짝 놀랐어요.” 무빈씨는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버티게 하는 ‘배후’가 아들이라고 했다. 아빠더러 5월에는 시청에 나가자고 하더니, 6월에는 여의도에 나가라고 ‘지시’했다. “바른 언론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였다. 촛불은 그의 생활을 뒤흔들었다. 보름이면 될 줄 알았던 무료 자원봉사가 어느새 ‘주업’이 돼버린 것이다. 자유기고가라 시간 제약이 덜하기도 했지만 “촛불이 꺼지지 않고 공영방송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사재를 털고, 생업도 잠시 접었다. 요즘은 오후 6시에 나와 새벽 1시쯤 들어간다. 처음엔 한달 남짓 밤을 꼴딱 새웠다. 촛불 시민들의 해산 시간도 ‘노란천막’의 철수 시간이 기준이 됐다. “제가 안 가면 촛불 시민들이 밤을 새우더라구요. 오래 버텨야 하니까 요즘은 막차 끊어지기 전에 철수합니다.” 이제 이곳 촛불 시민들은 속속들이 서로를 아는 ‘한식구’가 됐다. 그 중심에 살림살이를 도맡은 그가 있다. 무빈씨 외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을 지켜온 이들은 10여명에 이른다. “그간 인간사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일을 겪었어요. 촛불 시민을 가장한 소매치기, 여기서 만나 커플이 된 남녀, 아고라 깃발을 이용해 교육감 선거전을 편 보수단체 등 별일이 다 많았지요.”
그의 바람은 촛불 시민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다치지 않고 촛불을 계속 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때론 칼부림하며 시비 거는 사람이나 우파 단체의 해코지도 막아내야 했다. ‘촛불 편성표’를 짜 언론장악 관련 프로그램 ‘재상영’이나 음악을 틀어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촛불 탄압을 보다 못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인권 탄압의 목격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한국방송 노조가 공영방송을 지켜내는 노둣돌이 되기를 기대했다. 백일 동안 그곳을 지키며 그 누구보다 한국방송 안팎의 사정에 밝은 그는 정부와 경영진에 대항해 힘겹게 싸우는 구성원들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아궁이 속 불이 꺼진 것처럼 보여도 살짝 들춰보면 뜨거운 숯이 이글거리잖아요. 지금 촛불이 그래요. <와이티엔>(YTN)으로 조계사로, 강남으로, 영등포로, 구로로, 이곳에서 퍼져나간 촛불이 곳곳에서 정권의 반민주적 방송장악 실체를 알리고 있습니다. 촛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어용노조 교체될 때까지 지켜볼 것” “일단 12월 케이비에스 노조 선거 때까지 지켜볼 예정이에요. 어용노조가 교체되면 공영방송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지속적으로 은은하게 피워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케이비에스라는 방송에 대한 애정이 식을 것 같아요.”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KBS) 본관 주변 전경차 행렬 옆, ‘노란천막’이라는 이름의 트럭이 서 있다. 그 트럭엔 양초, 생수, 컵라면, 커피 등과 음악을 들려주는 앰프, 각종 손팻말이 한가득 실려 있다. 이른바 촛불 시민들의 ‘노상카페’다. 돈은 받지 않는다. ‘노란천막 카페지기’ 무빈(49·아고라 필명·사진)씨는 감사원이 한국방송 특별감사에 들어간 지난 6월11일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 이 자리에 나왔다. 정부의 방송방악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서다. 100일을 하루 앞둔 17일 밤에도 어김없이 그는 ‘노란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백일간의 촛농으로 반질해진 길 위에는 30명 남짓의 촛불 시민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애초 천막은 7월 중순 강제철거당해 트럭이 대신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겐 ‘노란천막’이라 불린다. 촛불 시민들에게 ‘노란천막’은 갈증을 풀어주고 출출함을 달래주는 ‘고유명사’가 됐다.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놈’이 광우병 관련 보도를 분석하는데 깜짝 놀랐어요.” 무빈씨는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버티게 하는 ‘배후’가 아들이라고 했다. 아빠더러 5월에는 시청에 나가자고 하더니, 6월에는 여의도에 나가라고 ‘지시’했다. “바른 언론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였다. 촛불은 그의 생활을 뒤흔들었다. 보름이면 될 줄 알았던 무료 자원봉사가 어느새 ‘주업’이 돼버린 것이다. 자유기고가라 시간 제약이 덜하기도 했지만 “촛불이 꺼지지 않고 공영방송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사재를 털고, 생업도 잠시 접었다. 요즘은 오후 6시에 나와 새벽 1시쯤 들어간다. 처음엔 한달 남짓 밤을 꼴딱 새웠다. 촛불 시민들의 해산 시간도 ‘노란천막’의 철수 시간이 기준이 됐다. “제가 안 가면 촛불 시민들이 밤을 새우더라구요. 오래 버텨야 하니까 요즘은 막차 끊어지기 전에 철수합니다.” 이제 이곳 촛불 시민들은 속속들이 서로를 아는 ‘한식구’가 됐다. 그 중심에 살림살이를 도맡은 그가 있다. 무빈씨 외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을 지켜온 이들은 10여명에 이른다. “그간 인간사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일을 겪었어요. 촛불 시민을 가장한 소매치기, 여기서 만나 커플이 된 남녀, 아고라 깃발을 이용해 교육감 선거전을 편 보수단체 등 별일이 다 많았지요.”
그의 바람은 촛불 시민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다치지 않고 촛불을 계속 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때론 칼부림하며 시비 거는 사람이나 우파 단체의 해코지도 막아내야 했다. ‘촛불 편성표’를 짜 언론장악 관련 프로그램 ‘재상영’이나 음악을 틀어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촛불 탄압을 보다 못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인권 탄압의 목격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한국방송 노조가 공영방송을 지켜내는 노둣돌이 되기를 기대했다. 백일 동안 그곳을 지키며 그 누구보다 한국방송 안팎의 사정에 밝은 그는 정부와 경영진에 대항해 힘겹게 싸우는 구성원들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아궁이 속 불이 꺼진 것처럼 보여도 살짝 들춰보면 뜨거운 숯이 이글거리잖아요. 지금 촛불이 그래요. <와이티엔>(YTN)으로 조계사로, 강남으로, 영등포로, 구로로, 이곳에서 퍼져나간 촛불이 곳곳에서 정권의 반민주적 방송장악 실체를 알리고 있습니다. 촛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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