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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독재가 낳은 ‘60년대 미네르바’ / 한승헌

등록 2009-01-19 18:27수정 2009-01-19 23:07

1967년 5월 소설 <분지> 필화사건으로 기소된 작가 남정현씨의 결심공판을 마치고 변호인단과 문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특별변호인 안수길, 이항녕, 필자, 남정현, 박용숙, 표문태, 최인훈씨.
1967년 5월 소설 <분지> 필화사건으로 기소된 작가 남정현씨의 결심공판을 마치고 변호인단과 문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특별변호인 안수길, 이항녕, 필자, 남정현, 박용숙, 표문태, 최인훈씨.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12
소설 <분지>의 작가 남정현씨는 1966년 7월23일 마침내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미군의 만행을 작품으로 다루면 반국가적 범죄가 된다니, 무슨 논리인가?

“남한의 현실을 왜곡 허위 선전하여 계급 및 반정부 의식을 조장하고 …, 반미사상을 고취하여 한-미 유대를 이간함을 표현하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단편소설을 창작하여 …, 북괴의 대남 적화전략의 상투적 활동에 동조한 것이다.”

이것이 공소사실의 결론 부분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주인공 만수가 실업 상태에 허덕이는 대목을 군 복무를 모독한 것으로 보았는가 하면, 6·25를 ‘돌연한 충돌’이라고 썼다고 해서 ‘공산군의 남침을 은폐하였다’는 식이었다.

검찰의 그러한 기소는 문인 사회에는 물론이거니와 언론계·학계 등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서울형사지방법원의 박두환 판사에게 배당된 이 사건의 공판은 그 해 9월6일부터 시작하여 전후 여덟 차례에 걸쳐 열렸다. 첫 공판 때부터 법정은 문인들을 비롯한 지식인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피고인석의 남정현씨는 조금 수척한 모습이었지만,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자기 작품에 대한 용공 혐의를 부인하였다.

재판의 하이라이트는 증인 신문이었다. 검찰이나 변호인 쪽의 신청으로 법정에 나은 증인들은 서로 상반되는 진술을 통하여 마치 대리전이라도 떠맡은 인상을 주었다.

검찰 쪽 증인 가운데, 월남 뒤 공산권문제연구소장으로 활약 중이던 한재덕 증인은 “분지(糞地)라는 제목부터가 심히 반미적이다. 주인공을 홍길동의 후손으로 설정한 것은 북괴 방송의 ‘홍길동’에 동조하는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남파 간첩으로 복역하던 최아무개 증인은 “이 소설은 남한에 대한 북괴의 악선전을 대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함흥공산대학을 나왔다는 이영명 증인은 당시 육군 정보기관의 군속으로 근무하는 사람이었는데, “철두철미한 공산주의 작가가 최고로 기술을 발휘해서 쓴대도 이 이상일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극언을 했다.

반면, 문학평론가이자 이대 교수였던 이어령 증인은 이 작품의 용공성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는, 이 소설은 우화적 기법으로 쓴 것이어서 친미도 반미도 아니라고 전제하고, “이 작품을 북한 공산집단의 주장에 동조했다고 공격하는 것은 마치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장미의 뿌리는 장미꽃을 피우기 위해 있는 것이므로 설령 어느 신사가 애용하는 파이프를 만드는 데 쓰여졌다고 해서 장미 뿌리는 파이프를 위해서 자란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비유법을 활용하여 법정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화가 난 검사가 증인에게 물었다.

검사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놀랐는데. 증인은 용공적이라고 보지 않는가?”

증인 “나는 놀라지 않았다. 병풍 속의 호랑이를 진짜 호랑이라고 아는 사람은 놀라겠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아는 사람은 놀라지 않는다.”

67년 5월24일에 열린 결심 공판에서 검사는 징역 7년을 구형했다. 변호인들(이항녕·김두현·필자, 그리고 특별변호인 안수길)은 물론 무죄를 주장했다. 나는 문학의 본질과 기법에 대한 이해 없이 특수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의 색맹 같은 단견으로 작품을 용공시하여 ‘분지(憤志)를 곡해한 분지(焚紙)의 위험’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특별변호인(변호사는 아니지만 법원의 허가를 얻어 변호인의 직무를 맡게 되는 사람을 일컫는다)으로 나온 원로 작가 안수길 선생은 “미국의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를 써서 나치 독일의 반미전선에 크게 이용당했지만, 이 작가는 법정에 선 일이 없다”고 하여, <분지>가 북한의 잡지에 전재되었다는 이유로 처벌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극명하게 일깨웠다. 언론에서도 ‘계급 의식이 법적으로 배척될 근거는 없으며, 반미감정을 어째서 불법으로 속단할 수 있는가’라고 검찰을 비판했다.

6월28일에 선고된 판결의 주문은 ‘선고 유예’였다. 무죄는 아니지만 집행유예보다 가벼운 것이어서 유죄를 선고한 법관의 고뇌가 엿보였다.

우리 쪽은 항소를 했으나 기각을 당했고, 더는 법원에 기대할 여지가 보이지 않아서 아예 대법원에는 상고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해서 동인문학상까지 받은 유망한 작가 한 사람은 전과자가 되었고, 이 나라의 문학과 창작의 자유는 반공법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되었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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