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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 찾아서] 민청학련 사건, 사법부의 수치 / 한승헌

등록 2009-02-22 18:44수정 2009-02-23 16:14

1974년 5월 대통령 긴급조치 사건의 항소심을 맡은 비상고등군법회의 법정의 내부 전경. 단상의 육군 재판관들과 등을 지고 서 있는 단하의 피고인들 사이 오른쪽으로 필자의 옆모습이 보인다.
1974년 5월 대통령 긴급조치 사건의 항소심을 맡은 비상고등군법회의 법정의 내부 전경. 단상의 육군 재판관들과 등을 지고 서 있는 단하의 피고인들 사이 오른쪽으로 필자의 옆모습이 보인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34
현직 판사들이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법부 관련 사건은?

1995년 봄, 서울의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전국 5대 도시의 현직 법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유신 치하의 민청학련 사건 등 긴급조치 사건 판결들이 ‘수치스런 판결’ 제1위로 나왔다. 사건의 허구성으로 보나 피고인의 수와 형벌의 가혹함으로 보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신헌법 개헌운동을 징역 15년으로 저지시켜 보려던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만으로는 국민의 저항을 진압할 수 없게 되자 74년 4월3일, 마침내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한마디로 반정부 청년 학생세력을 소탕하려는 엽기적 처방이었다. 그 내용인즉,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고무·찬양하는 일체의 행위를 최고 사형에까지 처하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학생의 정당한 사유 없는 결석이나 시험 거부행위에 대해서도 5년 이상의 징역에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다는 규정도 있었다.

정부는 민청학련이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재건위, 재일 조총련계와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 74년 4월3일을 기해 정부를 전복하려고 한 불순세력으로, 이들은 북괴의 통일전선 형성공작과 동일한 4단계 혁명을 통해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권 수립을 목표로 하고, 과도적 정치기구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획책하였다”고 발표했다. 불법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집권한 자들이 툭하면 반대자들에게 ‘정부 전복 기도’ 운운하고 뒤집어 씌우는 수법은 참으로 희극적이었다.

수순에 따라 대량 검거가 시작되었다. 중앙정보부가 붙들어다 조사한 사람만도 1204명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 745명을 훈방하고, 253명을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송치했다. 그 가운데 기소된 사람은 180명이었으며, 그들에게는 긴급조치 4호·1호,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외에 내란예비음모·내란선동까지 죄목도 다양했다.

그런데 민청학련이란 단체는 실재한 일도 없었고, 단지 학생들이 발표한 ‘민중·민족·민주 선언’이란 유인물에 편의상 붙인 명칭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서 정부 전복을 노린 불순 학생조직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연행된 젊은이들은 중정에서 억지 자백을 강요받은 끝에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그런 참혹한 사실이 군법회의 법정에서 폭로되기도 하였다.

한여름의 폭염 속에서 요식행위에 불과한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피고인들 중에서 ‘주력부대’ 32명을 한 건으로 묶은 사건을 다른 변호사들과 분담해서 맡았다. 다행스럽게도 이 사건 재판 때부터 이세중, 홍성우, 황인철, 강신옥 등 훗날 ‘인권 변호사’의 주축을 이루는 변호사들이 시국사건 변호인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정이 강신옥 변호사의 법정 변론 내용을 법정모욕죄 등으로 몰아서 구속하는 불의의 사태가 일어나서 국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해 7월 13일에 선고된 1심 판결은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철, 유인태, 김병곤, 나병식, 여정남, 김지하, 이현배, 이렇게 7명에게 사형이 떨어졌다.(여정남을 뺀 6명은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 무기징역도 7명이나 되었다. 피고인 32명 중 29명이 구형량과 똑같은 ‘정찰제 판결’을 받았다. 사형·무기를 뺀 18명의 형기를 합산하면 280년이 되었는가 하면, 긴급조치 1호·4호에 걸려 형을 받은 사람 가운데 사형·무기를 면한 203명의 형기를 합치면 2천년이 넘는다는 계산도 나왔다.

법정 공방은 날씨 못지 않게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 치도 굽힘이 없는 피고인들의 반격에 단상의 심판관들이 수세에 몰려 곤혹을 치렀다. 2심인 비상고등군법회의 재판장은 이세호 대장이었다. 재판과정에서 발언 제지·경고·휴정·항의가 되풀이되다가 마침내 단하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당황한 재판부는 피고인 전원에게 퇴장명령을 내렸다. 피고인석은 텅 비게 되었는데, 재판부는 나더러 변론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본 변호인은 저 바닥에 놓여 있는 빈 의자를 변호하러 온 것이 아니라, 방금 퇴장 당한 청년 학생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와 있다. 그러므로 그 청년 학생들을 입정시켜 주면 변론을 하겠다.” 결국 피고인들은 다시 법정에 들어왔고, 나는 준비된 변론을 하였다.

인혁당과의 연결고리로 기소되어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된 여정남군은 2심에서도 ‘항소 기각’이 되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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