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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사연 달라도 ‘부용산’에 웃고 취하고

등록 2009-05-01 21:03수정 2009-05-01 23:09

지난 30일 저녁 서울 운현궁 뒤편의 주점 ‘낭만’에서 열린 ‘부용산’ 노래마당에서 사회자인 소리꾼 임진택씨가 행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뒤로 ‘부용산 노래 누가 누가 잘하나!’라고 쓴 알림막이 보인다. 강재훈 선임기자 <A href="mailto:khan@hani.co.kr">khan@hani.co.kr</A>
지난 30일 저녁 서울 운현궁 뒤편의 주점 ‘낭만’에서 열린 ‘부용산’ 노래마당에서 사회자인 소리꾼 임진택씨가 행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뒤로 ‘부용산 노래 누가 누가 잘하나!’라고 쓴 알림막이 보인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요절한 누이 추모 노래가 60~80년대 저항가요로
지난달 30일 각계 인사 40여명 모여 ‘누가 잘하나’
“진보·보수 모두 실패…노래 들으며 희망 떠올리자”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60년 묵은 구전가요 ‘부용산’은 외롭지 않았다. 부르는 이마다 제각기 다른 가락 뽑아내며 ‘부용산’의 후손들이 갈래 갈래 세상에 퍼져갔음을 알렸다. 잦아드는 계면조로, 비장한 성악풍으로, 씩씩한 군가풍으로 화수분처럼 울려나오는 노래, 저마다 사연들 얹으며 부르는 노래, ‘부용산’은 인연의 산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소환되고, 한나라당이 재선거에서 전패한 지난 30일 저녁. 서울 운현궁 뒤켠 주점 ‘낭만’에 한때 정·관계, 문화계를 움직였던 원로·중견 인사 40여명이 모였다. 모인 이유는 단 하나. 사람마다 각기 ‘버전’이 다르다는 노래 ‘부용산’을 함께 부르고 듣기 위한 것이었다.

‘부용산’은 본디 1948년 목포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시인 박기동(1917~2004)이 24살에 요절해 전남 벌교 부용산 자락에 묻은 누이를 추모해 지은 시였다. 여기에 같이 교편을 잡았던 월북 음악가 안성현이 다른 16살 애제자의 갑작스런 죽음을 안타까와하며 선율을 붙였다. 그 뒤 남도에서 유행했던 이 노래는 ‘좌익’들이 주로 불렀다는 이유로 묻혀졌다가, 1960~80년대 운동권, 진보 지식인들에게 작자 미상의 구전가요로 알려지면서 애창곡으로 명맥을 이었고, 12년전엔 가수 안치환이 음반에 싣기도 했다.

♬ 코리아남성합창단이 부르는 부용산 듣기


<부용산> (박기동 작사 /안성현 작곡)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삼엄한 시대 뒷골목 술집에서 숨죽여 불렀던 이 노래를 세상 어수선한 이참에 마음 터놓고 불러보자며 ‘작당’한 것이 바로 이날 노래 마당이었다. 한달 남짓 전 술자리에서 만난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과 서상섭 전 국회의원, 김도현 전 문화부 차관 등이 ‘부용산’을 흥얼거리다 ‘서로 곡조가 다르니 누구 노래가 더 나은지 겨뤄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이두엽 교수(군산대)가 기획, 진행을 자원했다.

김도현씨가 심사위원장, 소리꾼 임진택씨는 사회를 맡아 이윽고 노래 자랑의 막이 올랐다. 먼저 등장한 더벅머리의 송상욱 시인. 기타의 트로트풍 선율에 맞춰 나긋한 음색으로 ‘부용산’ 가사를 곱씹었다. 지역 대표라는 벌교의 쪽물 염색 장인 한광석씨는 시원시원하면서도 구슬픈 여음 남는 목소리로 박수를 받았다. 감옥에서 노래를 익혔다는 운동권 출신의 서 전 의원은 낭랑한 저음을 깔았다.“…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어지고/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한국 전쟁 때 낙오한 인민군 장교에게 가락을 처음 들었다는 이계익 전 교통부 장관은 아코디언으로 애달픈 선율의 ‘부용산’을 들려주었고, 연주는 곧 합창으로 바뀌었다.

인사동 주점 <소설>의 주인인 ‘재야가수’ 염기정씨의 차례에서 노래 마당의 흥은 절정에 올랐다. 문인들이 읊조린 노래를 어깨 너머에서 들으며 외웠다는 그는 매혹적인 탁성으로 고즈넉하게 ‘부용산’을 불러 열광적인 앙코르 요청을 받았다. 분위기가 이슥해지자 김도현씨가 불콰한 얼굴로 일어났다. “오늘은 진보, 보수 모두 실패한 날, 누구도 이기지 못한 날입니다. 노래를 들으며 좌절과 절망을 추억하고, 희망과 낙관을 떠올려 봅시다.”

이날 심사 결과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밤 늦도록 술잔 기울이며 ‘부용산’과 자기네 삶에 얽힌 이야기꽃 을 피웠다. ‘부용산’이 엮어낸 애잔한 풍류의 밤이었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강재훈 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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